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서율 Mar 19. 2023

요리 실력은 평생의 복지다

가장 실용적이지만 가장 감성적인 "요리"이야기


이번에 회사를 퇴사하고 나서 가장 먼저 피부로 체감한 건 구내식당 복지가 사라졌다는 사실이었다. 그동안 점심은 항상 구내식당을 이용했는데 한식, 퓨전식, 면 요리, 건강식, 샐러드 5가지 메뉴에다가 별도로 샐러드바가 또 비치되어 있어 건강한 식사를 할 수 있다는 점이 정말 좋았다.


뉴스에서는 몇 개월 내내 외식물가 폭등으로 떠들썩한지 오래였지만 사원증만 태깅하면 아침 점심 저녁 언제든지 해결할 수 있었던 나에겐 와닿지 않았던 현실이었다.


퇴사 후 처음 일주일은 매 끼니 사 먹었는데 점점 현타가 오기 시작했다.

"비빔밥을 11,000원이나 주고 먹을 일이야?"

"바지락 하나 안 들어간 칼국수가 왜 10,000원인거지?"

"배도 안 차는 샐러드가 16,000원이라고?"

 

터무니없이 오른 물가에 음식값을 지불하는 게 아니라 치솟은 전기세, 가스비, 유통마진을 대신 지불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식당에 들어서면 벽에 붙어있는 원산지 표기부터 확인하는데 김치가 중국산인 곳이 대부분이었다.

며칠 전 담배를 피우며 썩은 배추를 절이던 중국 공장의 실태를 보도한 뉴스가 떠올라 김치에 선뜻 젓가락이 가질 않았다. 비싼 점심값을 내고 먹는데 김치조차 마음대로 먹을 수 없다니 어이가 없었다.


일주일 내내 모든 끼니를 외식으로 해결하는 건 정말 고역이었다. 신선하지 않은 원재료를 감추기 위해 양념을 가득 입혀 조리해서 그런지 먹고 나면 무언가 더부룩하면서도 허한 느낌이 들었다.


밑반찬도 오랫동안 보관이 용이한 절임류가 대부분이라 신선한 재료로 만든 음식이 너무 그리웠고 모양만 흉내 낸 영혼 없는 음식들 속에서 "제대로 건강하게 잘 먹었다"라는 느낌을 받기 어려웠다.   




"안 되겠네 요리해야겠다"

그동안 요리를 쉬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요리를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마트로 향했다.  


마트에 들어서면 습관처럼 가장 먼저 채소코너로 향한다. 어릴 때는 엄마의 카트 속을 가득 채운 채소들이 너무 싫었다. 다른 엄마들의 카트 안에는 과자랑 음료수 냉동식품들이 가득한 게 그땐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엄마는 탕수육이랑 양념치킨마저 홈메이드로 만들었던 사람이었다. 신선한 돼지고기를 깨끗한 기름에 튀겨내고 당근과 오이를 별모양 틀에 찍어 탕수육 소스까지 만들어 곁들였다. 양념치킨도 생닭을 사서 직접 튀기고 매콤달콤한 양념치킨 소스를 졸이는 냄새가 온 집안에 진동하면 그날 메뉴는 양념치킨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학교 소풍날이 되면 내 도시락은 선생님과 친구들에게 항상 화제가 되었다. 김밥에 주먹밥에 양념치킨에 과일에 예쁘게 장식한 가니쉬까지 엄마는 이왕 하는 거면 제대로 하는 사람이었다.


"음식은 눈으로도 먹는 거야 접시에 이렇게 조금씩 정갈하게 담아서 먹어야 해"

"반찬은 침이 들어가면 쉬어버려, 귀찮다고 반찬통 그대로 먹지 말고 접시에 담아서 먹어"

"신선한 재료로 직접 만들어 먹는 게 가장 깨끗하고 맛있는 거야"   


엄마와 연을 끊고 산지 오래되었는데

나의 카트 속을 들여다보니 엄마는 여전히 내 곁에 있었다.


가지, 새송이버섯, 표고버섯, 샐러드 채소, 마늘, 파, 토마토, 지방이 적은 양지살, 동물복지 달걀, 무설탕 요거트.. 오랜만에 장을 보아도 나의 카트엔 대부분 가공되지 않은 원재료로 가득 차있는 건 매번 똑같다.


사 먹는 음식은 고작 일주일만 지나도 질리는데 매끼를 직접 만들어 먹는다면 얼마 만에 질릴까? 갑자기 이런 의문이 들어 양껏 장을 봐놓고 냉장고에 있는 재료가 모두 소진될 때까지 오로지 내가 만든 요리들로만 연명하는 챌린지를 해보기로 했다. 이것도 퇴사하고 시간이 많았던 덕분에 가능한 실험이었다.




혼자 음식을 해 먹다 보면 처음엔 반찬을 이것저것 만들어보다가도 결국 한 그릇 요리에 정착하게 된다. 양이 많지 않으니 많이 펼쳐놓고 먹어봤자 남기는 게 더 많다.


한 그릇 요리는 맛도 영양소도 플레이팅도 딱 한 그릇 안에 모두 담아내니 한 그릇의 미학이라고 할 수 있다. 한 그릇 음식으로 가장 편하게 만들 수 있는 건 파스타이다. 파스타면은 어떤 재료와 어떤 소스를 입혀도 찰떡같이 어울리는 요리가 되어준다.


파스타는 일반적인 밀가루 면과 다르게 100% 듀럼밀로 사용하는데 듀럼밀에는 단백질 함량이 13%~16%나 들어있어서 흰쌀밥의 단백질 함량이 6~8% 들어있는 걸 감안하면 두 배 정도 차이가 난다. 게다가 흰쌀밥보다 GI 수치가 낮고 식이섬유가 많이 들어있어 소화과정도 천천히 진행되어 포만감이 오래간다. 그래서 대부분 요리를 할 때 흰쌀밥은 일절 쓰지 않았고 현미밥이나 파스타면으로 탄수화물을 보충하였다.


예전엔 이태리식 파스타에 꽂혔는데 요즘은 채소를 가득 넣고 쯔유를 베이스로 만든 소스의 일본식 파스타에 꽂혔다. 이 파스타는 오로지 채소로만 맛을 내는데 고기를 넣으면 특유의 깔끔한 맛이 사라져서 본의 아니게 채식을 하게 만든다. 몇 날 며칠을 해 먹어도 질리지 않는 걸 보니 별거 아닌 거 같아도 중독적인 마성의 맛이다.


새송이 버섯으로 만든 일본식 파스타
같은 소스로 가지 파스타도 자주 해 먹었다
재료가 심플한 만큼 깔끔한 맛이 일품이다


내가 선호하는 요리 스타일은 심플한 원재료에 풍미를 극대화하는 요리를 좋아한다. 이런 요리는 간단한 재료로도 정말 맛있고 건강에도 좋을뿐더러 인스턴트에 무뎌진 미각도 살아난다.


조금 특별한 소스를 구비해 두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채소로만 만든 심심해 보이는 파스타에 중독된 이유는 소스가 맛있어서다. 재료가 심플하면 소스에 힘을 줘야 하는데 나는 염도를 맞추는 소스보다는 풍미를 올리는 소스를 애용한다.


일본산 맛간장, 일본산 라유, 참치액이나 쯔유, 트러플오일, 치킨스톡, 파프리카 파우더, 커리 파우더같은 소스를 구비해 두면 단순한 원재료를 가지고 풍부한 맛의 요리를 만들어낼 수 있다.




요즘은 유튜브에 요리 이름만 검색하면 다양한 레시피들이 무궁무진하게 나와 너무나 편한 세상이다. 옛날에 엄마가 레시피를 필기해 둔 노트를 뒤적이며 요리하던 모습을 생각해 보면 나는 정말 편한 시대에 살고 있구나 생각했다.


요리를 할 때뿐만 아니라 심심할 때도 레시피 영상을 봐두면 요리에 대한 기본 지식을 익힐 수 있다. 재료 넣는 순서와 간을 맞추는 원리, 올바르게 칼질하는 법, 요리의 풍미를 끌어올리는 간단하지만 중요한 팁들을 알아두면 두고두고 요긴하게 쓰인다.


오래전에 심심해서 양식 조리기능사 클래스를 들은 적이 있었는데 요리의 기초 지식들을 아직까지도 잘 써먹고 있다. 양식 클래스 하나만 들어도 한식과 일식을 만들 때 응용할 수 있었는데, 예를 들어 살짝 타서 팬에 들러붙은 재료가 맛이 원천이라 물을 넣고 살살 긁어내어 섞는 방법이 양식에서는 디글레이징이라고 하는데 김치볶음밥을 할 때도 들러붙은 재료들에 약간의 물을 부어 디글레이징 해서 볶아내면 훨씬 맛있는 김치볶음밥을 만들 수 있다.


이렇게 하나의 원리만 알면 국적을 넘나들며 응용할 수 있어서 모든 레시피가 유용하다.   


직접 만든 반찬들 (표고버섯볶음, 마약계란장, 소고기야채볶음, 표고버섯 전과 계란말이)
직접 만든 반찬들 (매운 야채볶음, 두부짜글이, 어묵볶음, 대왕계란말이)




일본식 채소 파스타를 며칠간 신나게 만들어 먹다가 이번엔 일본식 카레를 만들었다.

양파 2개를 얇게 채 썰어 전자레인지에 5분간 돌리면 숨이 죽는데 이 상태로 프라이팬에 볶아내면 캐러멜라이징 하는 시간을 최대한 단축할 수 있다.


양파가 완전히 갈색빛으로 캐러멜라이징이 되었으면 그때 샤브샤브용 얇은 소고기를 넣고 함께 볶다가 물을 넣고 고체카레 블럭과 무염버터를 넣어 녹인 다음, 페퍼론치노를 부셔 넣고 마지막에 다크초콜릿을 조금 넣어주는 게 팁이다. 초콜릿이 들어가면 은은한 단맛과 감칠맛이 확 올라간다.


카레를 먹어보니 기가 막힌 맛이다. 일본카레를 좋아해서 일본카레 전문점을 자주 가곤 했는데 내가 만든 게 훨~씬 맛있었다. 예전에 오사카 여행을 할 때 숙소 주인아저씨한테 추천받아 갔던 미친 맛의 로컬 카레집과 얼추 비슷한 맛이 나왔다.


양파를 충분히 볶아 캐러멜라이징을 해준 다음 소고기를 넣고 볶는다
카레가 거의 완성되었을 때 페퍼론치노와 초콜릿을 조금 넣으면 풍미가 올라간다
예쁜 접시에 플레이팅 한 일본카레


그 외에도 부라타치즈와 루꼴라 토마토로 샐러드를 만들어 먹거나, 야채를 가득 넣어 볶음밥을 휘리릭 만들어 먹거나, 홀토마토로 에그인헬을 만들어 먹거나, 내가 직접 만든 새우오일로 새우 파스타를 만들어 먹었다.


부라타치즈, 루꼴라, 방울토마토로 만든 샐러드
두부를 으깨어 수분기 없을 때까지 볶은 다음 야채를 넣고 볶음밥을 만들었다  
한동안 자주 해 먹었던 에그인헬, 홀토마토를 써서 신선하다
직접 만든 새우오일로 만든 새우파스타, 한 입만 먹어도 새우풍미가 가득하다
달콤하지만 건강한 간식


정말 신기한 건 내가 만든 요리로만 한 달 넘게 연명하는데도 외식 생각이 전혀 나질 않았다는 거였다. 이게 가능했던 이유는 첫 번째로 신선한 원재료를 내가 원하는 만큼 쓸 수 있어서 영혼이 꽉 찬 요리였고, 두 번째는 만드는 요리들이 족족 맛있어서 가능한 일이었다.


요즘 같은 고물가 시대에 구내식당이 있는 회사가 최고의 복지라고 하지만, 요리를 잘하면 회사를 다녀도 퇴사를 해도 자식이 생겨도 나이를 먹어도 평생 써먹을 수 있는 최고의 복지다.


요리를 잘하는 사람이 되면 누구나 사용하는 흔한 재료도 특별한 요리로 만들어내서 내 자신이 고급인력처럼 느껴진다.


또한 요리는 창조하자마자 바로 맛보고 즐길 수 있어 즉각적인 성취감을 안겨주며 정신 건강에도 많은 도움을 준다.




이번에 새로 이직이 확정된 직장은 구내식당이 없다는데 주변에 괜찮은 식당이 없다면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닐 계획이다. 사실 감성 가득한 예쁜 도시락이 로망이라 예전부터 싸 보고 싶었는데 멀쩡한 구내식당을 두고 쓸데없는 짓이라 생각해서 시도를 안 해봤다.


인터넷 쇼핑몰에 들어가 나무 도시락통 마게왓빠를 구경한다. 후리카케를 뿌린 밥에 연어스테이크를 올리고 그린빈을 굽고 도톰하고 고운 색깔의 계란말이를 넣고 시소잎과 토마토로 마무리하는 상상을 한다. 이렇게 머리로 상상했던 게 곧바로 실물로 나오니 그 재미에 자꾸만 요리를 하는 것 같다.


도시락을 구상하는 모양새도 엄마의 도시락과 똑 닮은 거 보니 새삼 엄마에게 고마워졌다. 덕분에 건강한 식사를 좋아하게 되었고, 요리를 사랑하게 되었으니까.

나도 자식이 생기면 엄마에게 받았던 것처럼 요리의 즐거움과 건강한 식습관을 그대로 물려주고 싶다.   




누군가 새로운 취미를 고민한다면 나는 주저 없이 요리를 추천한다.


가장 실용적이지만 가장 감성적이고, 몸도 마음도 모두 건강해지고, 나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언제든지 선물할 수 있고, 평생 동안 최고의 복지를 선사하는 요리를 나는 적극 추천한다.  









작가의 이전글 징글징글한 전 남자친구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