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손서율 Mar 26. 2023

나의 핑크색 인감도장

일평생 나의 역사를 결정지어온 가장 오래된 물건


서류를 다 작성하고 인감도장에 인주를 꾹꾹 묻혀 서명란 옆에 있는 (인)자 위에 힘껏 눌러 찍었다.


"휴.. 끝났다" 

자리에서 일어나 커피 한 잔을 내리고 테이블에 다시 앉았는데 서류 위에 서있는 인감도장이 창문 사이로 새어 들어온 햇빛을 받아 영롱하게 반짝인다.


반짝이는 플라스틱 핑크색 인감도장

마치 소꿉놀이 장난감 같기도 하고 요술공주의 변신 도구 같기도 하다.


나는 핑크 도장을 집어 들어 이리저리 들여다보다 문득 이 핑크 도장과의 첫 만남을 회상해 보았다. 내가 몇 살이었는지도 뚜렷하게 기억나질 않는 초등학교 저학년 즈음에 아빠가 파온 인감도장이었다.


"서율아 꾹 눌러봐 그럼 여기서 네 이름이 나와"

"와 예쁘다!"


반짝이는 핑크색 장난감에서 내 이름이 찍혀 나온다니. 며칠 내내 졸라서 겨우 살 수 있었던 웨딩피치 릴리 인형 다음으로 인상 깊은 장난감이 이 인감도장이었다.


그러고 보니 흠집 하나 없이 매끈한 이 핑크 도장이 집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통틀어 가장 역사가 오래된 물건이라는 걸 깨달았다. 어림 짐작해서 내가 10살 때였다고 가정해 보면 적어도 26년을 함께한 최장기 역사를 가진 물건이니까


지금은 핑크와 상당히 거리가 먼 내가 아무 이질감 없이 사용해 온 걸 보니, 자신의 취향과는 상관없이 주어진 대로 적응하고 살아가는 이름처럼 이 핑크 도장도 내 인생에서 당연한 존재가 되었나 보다.


역설적이게도 이 깨발랄한 플라스틱 핑크 도장을 그동안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중대사를 결정할 때마다 꺼내 들었다.


부동산 전세 계약서 앞에서 혹여나 불리한 사항이 있지 않을까 바짝 긴장한 상태로 꺼내 들거나, 회사와의 근로 계약서 앞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걱정과 설레임을 안고 꺼내 들거나, 성추행 가해자와의 합의서 앞에서 비통한 심정으로 꺼내 들거나, 채무자가 되어버린 전 애인과의 차용증 앞에서 아픈 가슴을 억누르며 꺼내 들거나


정말 중대하거나, 정말 가슴 아픈 자리에서 나는 플라스틱 핑크 도장을 꺼내 서명란 옆에 있는 (인)자 위에 힘껏 눌러 찍었다.


어릴 때는 예쁜 장난감이었던 핑크 도장이 성인이 되니 일평생 나의 역사를 결정짓는 현장에서 긴장과 설렘, 아픔을 함께 지켜봐 주었다.


하지만 지금 내 손에 들려있는 핑크 도장은 방금 공장에서 막 찍어낸 새 장난감 같다. 이렇게 많은 대서사시를 품고 있는데도 언제 그랬냐는 듯 귀엽게 반짝거릴 뿐이다.


그 모양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살아가고 있는 내 모습 같다.


"서율씨는 얼굴은 귀여운데 목소리가 중후해서 안 어울려요 그게 매력이지만" 누군가 나에게 이런 말을 했다.


나의 플라스틱 핑크 도장도 말할 수 있었다면, 겉모습과 다르게 목소리가 제법 중후했을 거다.









작가의 이전글 요리 실력은 평생의 복지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