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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Apr 23. 2023

논픽션을 고집하는 이유

훗날 상처가 돼도 지켜야 하는 작가의 사명


“작가님이 쓰신 글들은 픽션인가요 논픽션인가요?”

이번에 새로운 회사와의 미팅에서 가장 먼저 받은 질문이었다.


웹소설 분야라서 시나리오 포트폴리오만 확인하신 줄 알았는데 의외로 나의 에세이들을 더 관심 있게 살펴보고 나오셨다.


“전부 다 논픽션이에요 꾸며진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습니다”

“굳이 논픽션을 고집하시는 이유가 있나요? 요즘은 꾸며낸 이야기도 실제 경험처럼 쓰는 경우가 많아서요”

“저는 그렇게 못 하겠어요 제 자신을 속이는 것 같거든요”


'논픽션' 글을 처음 쓰기 시작하면서 가장 걱정되었던 부분이었다. 나의 인생을 사람들에게 모두 까발리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니까


가슴 아픈 가족사, 과거 연애들, 성추행 사건의 피해자가 된 수치스러운 기억까지 모두 다 사실대로 적었다.


유교의 나라에서 미혼 여자의 신분으로 남들은 흠이 될까 봐 숨기고 살아가는 스크래치마저, 나는 불특정 다수가 읽는 공간에 얼굴까지 오픈하고 날카로운 문체로 써 내려갔다.


나를 아끼는 지인들은 혹여나 내 글이 흠이 돼서 돌아올까 봐 걱정했다.

“가족사는 쓰지 마 너한테 흠이 될 수도 있잖아”

“과거 연애 이야기도 지우면 안 돼? 남자들은 과거에 민감하잖아”


그럴 때마다 나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자신의 경험과 감정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쓰는 게 작가의 사명이라고 생각해, 어쩔 수 없어 내가 안고 가야지”


심지어 출판사와의 미팅에서도 걱정을 들었다.

“나중에 본인의 상처를 주제로 책을 쓸 수 있나요?”

“네 할 수 있어요”

“쉽지 않은 일인데.. 괜찮으시겠어요?”

“작가로서 거쳐야 할 과정이라고 생각해요”


그런데 이번 미팅에서는 장르가 수필인데도 논픽션인지 설명해야 했고 심지어 수필도 도용이 많아서 저작권이 필요하다고 하시는데. 막상 시장에 나와보니 작가의 사명으로 똘똘 뭉친 나는 정말 순수(?) 했다는 걸 깨달았다.


본업이 스릴러 시나리오 작가라 말도 안 되는 허구의 이야기를 술술 지어내는 게 업인데

수필만큼은 절대 논픽션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어느 순간 내 글이 나의 자아와도 같아져 버려서 꾸며낸 이야기를 수필로 속인다면 데스노트처럼 나의 자아가 산산조각 날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절대 타협할 수 없는 신념이라고 생각하며 살았는데 며칠 전 지인들이 우려했던 걱정이 현실로 일어났다.


나를 좋아하던 사람에게 마음을 연지 얼마 안 돼서 하루아침에 그에게 이별 통보를 받았는데 이유를 물으니 내 글 계정을 읽고 너무 많은 걸 봐버려서 단순히 사랑으로는 감당할 수 없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그래 존중할게”

그에게 무조건 적인 이해를 바라는 건 이기적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원하는 데로 고이 보내드렸다. 결국 내가 쓴 글 때문에 좋아하는 사람을 잃다니 이제 슬슬 논픽션의 업보가 돌아오고 있나 보다.


그래도 후회하진 않는다. 남자한테 잘 보이겠다고 데스노트를 쓸 순 없으니까. 거짓으로 미화한 수필을 썼다간 난 작가의 사명을 어긴 죄로 저주에 걸려 산산조각 날 거다.


2년 전, 고통 속에서 몸부림치다 펜대를 처음 잡았을 때 다짐했다. 글을 쓸 때만큼은 솔직해지자고.

덕분에 글로 아픔을 치유하고 여기까지 성장할 수 있었는데 그때의 초심을 잃는다면 나는 글을 쓸 이유가 사라진 것과 다름없다.


나라고 매끈하고 아름다운 조각상을 만들고 싶지 않겠는가. 하지만 조각상 여기저기 패어있는 보기 싫은 흠집들도 나의 일부분이다. 그걸 모두 메꿔버린다면 나라는 사람을 설명할 수가 없다.


앞으로 상처받는 일이 더 많아지겠지만 난 평생 논픽션의 업보를 짊어지기로 했다.


잃는 것보다 얻는 게 더 많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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