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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Apr 02. 2023

몸보다 글이 그리운 여자

잔인했던 한 여름밤의 꿈을 회상하며


정오가 넘은 시간까지 늦잠을 퍼질러 자고 있던 일요일이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들여다보니 작년 여름에 헤어졌던 전남자친구 현이였다.


"뭐야?"

시계를 보니 밤 12시가 아닌, 낮 12시라 술 먹고 전화한 거 같진 않아서 우선 받아보기로 했다.


"여보세요?"

"잘 지내? 오랜만에 너 글이 읽고 싶어서 계정에 들어와 봤는데 역시나 재밌더라고 읽다가 생각나서 전화해 봤어"

"그래? 재밌었다니 다행이네"

"응 알잖아 나 너 글 좋아했던 거"


입발린 소리가 아니라 현은 정말로 내 글을 좋아했다. 현과 처음 인연이 닿았을 때 그는 내가 1년 넘게 썼던 엄청난 글들을 이틀 동안 잠도 안 자고 정주행 해서 나는 그에게 잠 좀 자고 읽으라고 말렸을 정도니까


"참 신기해 헤어져도 전여자친구의 모든 근황을 알 수 있다니"

"만인한테 일기장을 공개하니 근황이 다 보이겠지"

"그러게 이런 적이 처음이라서 혼란스러워, 보통 헤어진 전여자친구는 몸이 그립기 마련인데 너는 글이 그립더라고"

"몸보다 글이 그립다니 작가한테는 최고의 칭찬이네 고맙다"


사람의 감정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우리가 이렇게 쿨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날이 오다니  


현이 돌연 나를 떠나버렸던 작년 여름은 폭염의 열기만큼 잔인한 계절이었는데 서늘한 가을과 시린 겨울을 지나 다시 꽃이 피어나는 계절이 오니 어느새 그 아픔마저 귀중한 추억이 되었다.




우리가 처음 만난 날 현은 무례하게 선을 넘었다. 그는 홀린 듯 내 눈을 들여다보더니 갑자기 입술을 포개는 게 아닌가


말을 놓기도 전에 입술부터 포개다니 무례한 놈! 귓방망이를 시원하게 날려줬어야 했는데 그땐 그러질 못했다. 그러기엔 현은 너무나 아름다웠으니까


현은 정마담 뺨치는 예쁜 칼이었다. 색기 가득한 눈, 날렵하고 오똑한 코, 갸름한 턱선, 웃을 때 예쁘게 올라가는 입꼬리마저 예술작품 같았다. 예술을 사랑하는 내가 현의 입맞춤을 어찌 거부하리오! 그렇게 우린 연인이 되었다.


우리는 고작 한 달 동안 화끈하게 사랑하고 화끈하게 싸웠다. 현과 나는 평행선 위에 마주 보고 서서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네가 먼저 휘어서 나의 영역으로 들어오라고 서로 주장하기 바빴다.


그렇게 싸움이 잦아지자 먼저 질린 건 현이였다.

"그만하자, 너나 나나 서로 못 맞춰주잖아 그냥 각자 맞춰주는 사람 찾자"

"어 그래 그만둬! 나도 못 해먹겠다"  


현이 나에게 이별 통보를 하고 나서 나는 고작 몇 분 뒤에 후폭풍이 찾아왔다. 나는 그날 밤을 꼬박 새우고 더 이상 답장이 오질 않는 현의 집 앞으로 무작정 찾아갔다.


침대에 누워 손등으로 눈을 가린 채 더 이상 나를 바라보지 않는 현 옆에서 무릎을 꿇고 이제 앞으로 내가 맞춰보겠다고 아주 구질구질 꼬질꼬질하게 매달렸다.


그런 내 모습이 그의 고양이 쿠로한테 마저 우스워 보였는지 쿠로는 살금살금 다가와 무릎 꿇고 있던 내 다리를 콱 물었다. "악!! 쿠로!!!" 내가 아파서 소리치자 쿠로는 눈으로 말했다 "넌 이미 끝났어 그만 돌아가"




현은 다시 생각해 보겠다며 일주일이라는 시간을 달라고 하더니 결국 이별을 선택했다. 그의 확답을 다시 들으니 할 만큼 다한 나도 이별을 받아들이기로 했고 그때부터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래 그깟 놈 하나 내가 잊어내고야 만다"  

그때부터 나는 8월의 숨 막히는 폭염 속에서 걷고 또 걸었다. 마음이 너무 괴로우니 땡볕 아래서 몸을 더 괴롭게 해 아픔을 분산시켜야 했다.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고 정수리가 타들어 갈 것 같고 현기증이 일어도 나는 걷고 또 걷고 또 걸었다.  


나는 나를 이성이라는 방에 가두었다. 그곳은 절대로 탈출할 수 없는 견고한 방이었다.

"여기서 그 새끼 생각을 질리도록 하고 술을 미친 듯이 먹고 할 수 있는 건 다 해! 근데 너는 절대 이방을 나갈 순 없어"


난 이성의 방에 갇혀 자는 시간을 제외한 모든 시간 동안 현을 생각했다. 한 달 반 정도 그의 생각만을 하고 살았더니 드디어 현이 질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목표했던 데로 그를 단기간 동안 잊어냈다.  


우리가 헤어진 지 두 달째 되던 날 술에 취한 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떠난 걸 후회하고 있다고 다시 만나보자는 이야기였다.


이별 후 여자는 바로 후폭풍이 오지만 남자는 두 달 뒤쯤에 온다더니 우리 또한 그 뻔하디 뻔한 공식대로 진부하게 흘러가고 있었다.


“나 과거 사람이랑 연락 안 해서 앞으로 연락 안 해줬으면 좋겠어”

이미 지발로 떠난 놈한테 베풀 자비란 없었다. 나는 그의 미련에 응하지 않았고 그에게서 두 차례 연락이 왔지만 단호하게 끊어냈다.


현도 한 자존심 해서 더 이상 연락이 안 오겠거니 했는데 해가 바뀌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 갑자기 대낮에 그에게서 전화가 오니 궁금해서 받게 된 거다.  


“30대 여자들은 원래 이래?” 20대만 만나본 현이 물었다.

"아니, 모든 30대 여자들이 다 그렇진 않아 내가 독한 거야”


술에 취한 전여친들 전화에 시달려왔던 현은 연락 한 통 없이 싹 다 잊어낸 내가 신기했나 보다.


“그래도 오빠는 내가 정말 예뻐했어 고작 한 달 만났는데 오빠에 대한 글을 4개나 썼더라고? 지분이 상당한 거지”


현은 내 말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대답을 했다.

“너랑 헤어지고 나서 네가 쓴 글을 여러 번 읽어보았는데 넌 잘못한 게 없었어 그저 감정에 솔직한 것뿐이었는데.. 나는 왜 그리 너에게 매정하게 굴었을까? 자책하는 너의 글을 읽으면서 넌 아무 잘못이 없었다는 말을 꼭 해주고 싶었어”


현의 이야기를 듣던 나는 순간 울컥했다.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의 사랑이 진짜였다는 사실을 재평가받았다는 게 슬펐기 때문이다.


매정했던 현에게 나도 고마운 건 있다. 사랑이 진부해져 버린 35년 산 심장에 불을 지르다니 덕분에 아직도 내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고, 잔인했지만 잊을 수 없는 한여름 밤의 꿈을 만들어 주었으며, 이별의 아픔을 겪어내고 한층 더 성숙해질 수 있었다.




“너는 장단점이 너무나 뚜렷한 여자야” 이어서 현이 내게 말했다.


“그래? 좋은 것부터 들어보자, 장점은 뭔데?”

“매력적이지. 아무것도 안 해도 사람의 마음을 살 수 있는 매력은 타고나야 하는데 넌 타고났어”

“그럼 단점은?”

“중요한 건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는 말 있잖아. 인생을 살 때는 좋은 태도인데 넌 그게 사랑에도 적용돼서 문제지”


고작 한 달 동안 현은 나의 단점까지 모두 파악했다. 남들에게는 말랑말랑한 영역인 사랑마저 난 의지로 이겨내야 하는 영역이었으니까. 어휴 피곤해.. 뭐 그리 비장하고 원칙적으로 사랑해야 하는 건지 나도 나 자신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조만간 만나서 막걸리나 한잔해 네가 좋아하는 복순도가 먹으러 가자, 너의 글을 좋아하는 팬의 입장으로써 얼굴은 마주할 수 있잖아”


현은 지 얼굴이 얼마나 치명적인지 모르고 있나 보다. 아니지? 뻔히 다 알면서 얼굴 공격하려고 불러내는 걸 수도 있다.


“그래, 나 요즘 바빠서 나중에 기회 되면 만나”


나는 무기한으로 그와의 만남을 미루었다.

아련한 추억은 뒤로하고 예쁜 칼에게 또 당할 수도 있으니 주의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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