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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Jun 15. 2023

역대 가장 화끈한 퇴사자

대기업 사장님 때려잡는 임원비서


"서율씨.. 이렇게까지 꼭 해야겠어요? 너무 외로운 싸움이잖아요"

센터장님은 적잖이 놀란 얼굴로 말씀하셨다.


"네, 저는 싸워야겠어요"

"그럼 퇴사하시는 거예요?"

"네 퇴사하려고요"

"다음 직장에 취업할 때 레퍼런스 체크는 어떻게 하시려고요.."

"나가면 아예 다른 일 할 거라서 상관없어요 센터장님은 그동안 할 만큼 다하셨어요 신경 써 주셔서 너무 감사했습니다"

"아니에요.. 더 도와드리지 못해서 미안하네요.. 앞으로 어떻게 하실 거예요?"

"지금까지 만들어둔 증거들과 녹취록을 정리해서 사장님께 메일 쓸 거고, 필요하면 언론도 탈 생각이에요"

"와.. 이건.. 한 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 같네요.."




2022년 12월, 나는 대기업에서 정규직 전환을 앞두고 계약직 연장을 축하한다는 황당한 전화를 받았다.


"네? 저는 애초부터 정규직 전환 조건으로 입사한 케이스인데요?"

"죄송합니다. 회사 내규 사정이 바뀌어서 정규직은 어렵겠네요"

"저한테 과실이 없으면 정규직 전환이 당연하다는 조건이었잖아요 계약직은 옵션에 아예 없었어요"

"당시 사규는 그랬는데 지금은 변경돼서요"


기가 막힌 일이었다. 정규직을 내걸고 모집한 공고에서 몇백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겨우 입사했더니 2년 뒤 갑자기 회사가 말을 바꾼 것이다. 더 황당한 건 내 뒤로도 정규직 전환 조건의 공고를 내걸고 갖은 까탈은 다 부리며 줄줄이 사람을 뽑아 놓고는 나 몰라라 해서 취업사기 피해자가 연이어 속출했다.


내가 속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회사가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이었고, 보통 대기업은 인사 채용에 대한 철저한 프로세스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대놓고 취업사기를 치는 경우를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경찰서인 줄 알고 들어왔는데 알고 보니 갱단인 특이한 상황인 것이다.


센터장님은 이제 막 핵심 경영진으로 고속 승진한 임원이셨는데 승진하면서 나를 본인의 비서로 지정하고 데려오자마자 이런 불상사가 터졌다.


근데 더 기가 막힌 건, 이번에 사장이 새로 바뀌면서 다른 계열사 임원이 사장으로 취임했는데 자기가 데리고 있던 비서를 버리고, 오래전 임원시절에 비서로 일했다가 퇴사한 생짜 백수를 이번에 정규직으로 바로 꽂았다는 소문이 들렸다.


모든 인사의 채용 프로세스를 무시하고 오로지 개인적인 친분하나를 내세워 무리하게 정규직으로 채용한 건데, 사장비서의 카톡 프로필을 보니 뻔한 액수의 월급으로 연명하다 퇴사한 20대 백수가 세계여행과 골프 라운딩을 다니는 럭셔리 라이프가 담긴 사진을 보니 상당히 구린내가 났다. 모두가 쉬쉬하며 수군거렸지만 아무도 발설할 수 없는 심증이었다.




나는 곧장 인사팀에 면담을 신청했고, 몇 시간 뒤 면담 장소에서 담당자들을 만날 수 있었다. 그들은 거만하게 고개를 치켜들고 저승사자마냥 어쩔 수 없는 내 운명이라고 지껄였다. 

"서율씨, 안타깝지만 사내규정이 바꼈어요 지금은 정규직 전환이 없습니다"


나는 태연하게 그들에게 거짓말을 하기 시작했다.

"이번에 새로 입사한 사장님 비서가 제 친구의 지인이거든요, 사장님께서 개인적인 친분 하나로 정규직으로 바로 꽂았다는 걸 친구 통해서 자세히 들었는데 이건 어떻게 설명하실 건가요?"

"아.. 어디까지 듣고 오신 건가요?"

"다 듣고 왔죠! 그래서 형평성에 어긋난다고 생각해서 면담신청한 거예요"


인사담당자들은 당황하기 시작했고 그들은 내가 모든 내용을 다 알고 있는 줄 알고 술술 털어놓기 시작했다.


"사장님을 위해서 특별히 세팅한 부분이라.. 저희와 상관없이 사장님의 지시로 채용된 케이스라서요"

"지금 말씀 주신 내용을 정리하자면 정식적인 절차를 거쳐서 채용된 사람들은 모두 취업사기로 정규직 전환이 무마 됐는데 그분은 사장님과 친분이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인사팀을 거치지도 않고 바로 정규직으로 채용이 된 거네요? 이거 채용비리 아닌가요?"

"아.. 그렇게 말씀하시면 곤란하죠.. 엄연히 다른 케이스입니다"

"직군이 똑같은데 뭐가 다른 케이스죠?"


인사팀이 술술 털어놓는 내용들은 고스란히 내 핸드폰에 녹음되고 있었고 나는 취업사기와 채용비리를 증명할 수 있는 2시간 분량의 녹취록을 얻을 수 있었다.


면담이 끝나고 회의실을 나오는데 감당할 수 없는 분노로 몸이 부들부들 떨려왔다. 정규직 전환이라는 조건을 굳이 달지 않아도 일하겠다는 지원자들이 넘쳐나는데도, 회사는 지들 입맛에 꼭 맞는 경력자를 쓰기 위해 거짓 채용 공고를 올려 청년들을 기만하고 황금 같은 시간을 빼앗았다.


이로써 임원평가, 팀장평가, 동료평가까지 모두 높은 점수를 받으며 성실하게 살아왔던 나의 지난 2년간의 노고가 철저하게 더럽혀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분노와 슬픔을 느낄 시간조차 사치였다.

그 시간에 국선 노무사와 상담하며 노동법에 대해 공부했고, 다른 대기업 인사팀 인맥을 통해 채용 프로세스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취업사이트를 뒤져 회사가 그동안 올려온 거짓 채용공고들을 증거로 모았고, 2시간짜리 분량의 면담 녹취록을 초단위로 끊어가며 법에 어긋난 부분을 찾아 글로 정리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은 증거들을 글로 정리해 보니 이건 뭐 항의하는 글이 아니라 뉴스 기사가 따로 없었다. 이 글을 언론에 제보하면 기자는 아무것도 안 하고 그대로 기사에 올려도 무방한 수준이었으니까.


내용이 모두 정리되자 인사팀 녹취록 파일을 첨부해서 부사장, 인사팀 임원들, 인사팀 담당자들을 모두 수신자에 넣어 항의 메일을 보냈고 올바른 조치가 취해지지 않는다면 사장님께 메일을 보내겠다고 경고했다.


그러나 내가 간과한 부분이 있었다. 대기업인데도 이렇게 대범한 사기를 친다는 건 보통 베짱이 아닌 조직이라는 거였다. 20년간 근무해 온 직원들도 하나같이 이렇게 말했다. "우리 회사 인사팀 사람말 무시하기로 유명하지, 메일 보내면 다 씹잖아" 산증인들의 말대로 그들은 내 메일에 아무도 답변하지 않았다.




이제 나는 이 힘겨운 개싸움을 본격적으로 시작할지 말지 선택의 기로에 놓였다. 만약 싸움을 하기로 마음먹었다면 영화 '킬빌'에서 노란색 추리닝을 입고 홀로 야쿠자 소굴로 들어가는 우마서먼처럼 100:1로 붙을 각오로 싸워야 한다.


그러기엔 나를 모두 갈아 넣어야 하는 싸움이라 그냥 꾹 참고 퇴사할까 생각해 봐도 홧병으로 오랫동안 시름시름 앓다가 죽는 것보다는 싸우다 급사하는 게 덜 고통스러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언니, 그냥 싸워.. 그게 언니의 건강을 위한 길이야" 역시 슬기는 나를 너무 잘 안다. 그런데 아무리 싸울 수 있는 깡이 있어도 무기가 없으면 소용없다. 우마서먼에게는 핫토리 한조의 명검이 있었고, 나에게는 사장비서의 채용비리가 그들에게 휘두를 수 있는 핫토리 한조의 검과 같았다. 이쯤 되면 사장비서에게 나의 무기가 돼줘서 고맙다고 감사 인사를 건네야 할 노릇이었다.




대기업이랑 본격적으로 싸우기 전에 어디까지 싸워보고 멈출 것인지 끝을 미리 정해야 했다.

나는 법적인 소송까지 가기 전에 멈추기로 했다. 아무리 '취업사기'와 '불공정채용'으로 붙는다고 해도 회사 측에서는 '명예훼손'이라는 히든카드가 있었다. 사실 적시를 해도 명예훼손이라니.. 가해자를 위한 보호장치가 생각보다 강력했다.


사장비서의 낙하산 채용은 회사 임직원들에게 널리 널리 알려질수록 나에게 유리했지만 사건과 관련 없는 불특정다수에게 퍼트리는 것은 명예훼손의 범주에 들어가서 위험했다.


나는 나 대신 떠들어 줄 사람을 물색했고, 인사팀 팀원 중에 입이 싼 여직원 P를 알아내어 매번 항의 메일 수신자에 함께 넣었다. 나와 직접적인 면담을 하진 않았어도 관련 부서에 있으니 수신자에 넣어도 어색하지 않았다.


P는 자신이 확성기로 이용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신나서 여기저기 떠들어댔고, 여직원들끼리 수군거리며 내 자리로 찾아와 내가 출근했는지 확인하며 히히덕거렸다.


P가 열심히 떠들어 준 덕분에 며칠 뒤 사장한테 메일을 쓸 때 인사팀 내부에 보안구멍이 하나 있어서 사장님의 채용비리가 직원들 사이에 일파만파 퍼지게 되었다고 책임전가를 할 수 있었고, 바로 불러서 조졌는지 히히덕거렸던 여직원들은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기나긴 일주일이 흐르고 부사장과 인사팀에게 보낸 메일에 대한 답변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이제 사장한테 메일을 쓸 차례였다. 사장은 같은 건물에 있어도 VIP 엘리베이터를 타고 다녀서 일면식도 없었고 기사와 사내 방송에서나 귀하신 용안을 볼 수 있었다.


과연 대기업 사장이 수많은 메일들 중에서 일개 매니저 직급인 나의 메일을 읽을까? 우선 사장이 내 메일을 클릭하게 만드는 게 관건이었다.


먼저 메일을 보내는 날짜와 시간부터 정해야 했다.

임원들 스케줄을 보니 월요일 오전 10시에 CEO 회의가 있었는데 참석자 리스트를 확인해 보니 내 메일을 무시했던 부사장과 인사팀 임원이 모두 참석하는 회의였고 회의는 10시부터 12시까지 진행되며 회의 후에는 오찬 일정까지 이어졌다.


나는 회의가 시작하기 두 시간 전인 오전 8시에 날카로운 어그로의 제목으로 사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불공정채용/취업사기] 손** 매니저 정규직 특채에 대하여 사장님께 여쭤봅니다." 만약 사장이 이 메일을 클릭한다면 부사장과 인사팀 임원은 월요일아침부터 사장한테 깨진 채, 점심까지 풀로 이어지는 릴레이 회의가 지옥 같을 것이다.


집에서 출근 준비를 모두 마친 나는 떨리는 손으로 메일 전송 버튼을 누르고 출근했고 사무실에 도착해 보니 회사는 이미 난리가 나 있었다. 메일을 확인한 사장이 부사장과 그 밑에 임원들을 사장실로 모두 집합시켜서 한바탕 난리를 쳤다는 거다. 설마 내 메일을 읽을까 싶었는데 제대로 스트라이크였다.


나의 메일은 백날 회사 앞에 모여 확성기를 들고 시위하는 노조들보다 훨씬 강력했다.

우선 저격 대상이 사장이었고, 학연/지연/혈연 그 어느 하나도 속하지 않는 20대 여성을 무리하게 낙하산 채용한 건 여러 심증을 낳아 사장이 불편할 수밖에 없는 이슈였으며, 심지어 인사팀이 채용비리 사실을 모두 인정하는 녹취록도 가지고 있었고, 기자 뺨치는 취재능력과 필력은 그들에게는 무시하고 싶어도 무시할 수가 없는 최악의 상대였다.


초반에 노무사와의 상담에서는 사건이 법의 사각지대에 있는 애매한 수준이라 소송해도 별 소득이 없다고 했는데 그동안 정리해 온 증거들을 보여주자 "이 정도 증거면 붙어도 되겠는데요? 소송하셔도 될 것 같아요!" 라고 할 정도였으니까


녹취록 증거를 토대로 언론을 타겠다는 메일 내용에 사장은 식겁해서 인사팀 임원을 시켰는지 임원한테 사과 메일이랍시고 왔는데 아무 조치도 없는 "사내규정이 변경되 미안하다" 는 앵무새 같은 소리뿐이었다.

나는 다시 사장을 참조에 넣어 "차라리 안 보내느니만 못한 메일은 삼가해 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회신했다.


어차피 이제 퇴사할 거니까 사장이고 나발이고 동네 아저씨와 다를 바가 없었다. 주변에서는 다음 취업에 대한 레퍼런스 체크를 걱정했지만 이 바닥에서 영원히 뜨기로 결심하니까 그것 또한 하나도 두렵지 않았다.


나는 윤리경영, 인사팀, 파견사를 돌아가면서 면담을 신청했고 상대측 참석자는 무조건 두 명씩 불러냈다. 팩트와 구라가 붙는 거니 구라를 내뱉는 입을 한 명이라도 더 불러야 녹취할 수 있는 증거가 많아졌다.

한 명이 무사히 넘기면 나머지 한 명이 꼭 결정적인 말실수를 했고 그건 모두 녹취록으로 남아서 추가 증거가 되었다.


남자 직원들은 체구가 작고 나이에 비해 동안인 내가 만만했는지 초장에 기선제압을 하겠다고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자, 이제부터 녹취하겠습니다" 하고 내가 핸드폰 녹음기를 틀면 상대측에서는 이를 바득바득 갈면서 "저희는 녹취록 사용을 동의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말했고, 나는 "제가 화자로 들어가면 그쪽에서 아무리 동의 안 해도 법적으로 사용 가능합니다" 라고 하면 상대는 한숨을 쉬며 목소리를 가다듬고 면담을 시작했다.


평소에 적을 두고 살질 않아서 모르고 있었는데 나는 생각보다 정말 대단한 인간이었다. 말싸움도 잘하고, 글싸움도 잘하고, 기싸움도 잘하고, 사람들을 용도에 맞게 자유자재로 싸움에 이용했다.

그동안 인생에서 산전수전 공중전까지 겪어왔던 어나더레벨의 경험치 보유자라는 걸 위기 상황이 닥치자 비로소 체감할 수 있었다.


이 개싸움은 나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를 주었지만 한편으로는 "아! 나는 여기서 나가도 절대로 굶어 죽지 않을 인간이구나" 라는 자기 확신이 들면서 맨땅에 헤딩할 용기가 생겼다.


어느새 나는 회사에서 유명인사가 되었고 이왕 유명해진 거 화장도 더 공들여하고 옷도 예쁘게 입고 다녔다.




하지만 나는 결국 회사에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처음엔 다들 당황해서 우왕좌왕하더니 이내 자기들의 주특기인 무응답으로 버티기에 들어간 거다.


똘똘함은 또라이를 절대로 이길 수 없었다. 이십 년 가까이 다녔던 임직원들도 인사팀의 무지성에 포기하고 수긍하며 살았던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법적으로 소송을 걸지 않는 한, 더 이상 싸울 수 없었고 나는 처음부터 정해두었던 싸움의 끄트머리에 다다랐음을 인정하고 깔끔하게 퇴사하기로 했다.


퇴사일이 다가오자 회사는 급하게 후임을 뽑아서 내 자리에 던지고 갔다. 채용 조건을 1년 파견직이라고 내걸어도 이렇게 사람이 빨리 뽑히는데 단지 많은 후보들을 모아 지네 입맛에 맞춰 뽑기 위해 그동안 무고한 청년들에게 채용 사기를 저질러 왔다는 게 기가 막혔다.

그래도 후임에게는 성실하게 인수인계를 해주었다. 회사와의 분쟁은 분쟁인 거고 센터장님께 마지막 도리는 해야 했다.


아무 수확 없는 두 달간의 싸움을 끝으로 퇴사날이 다가왔다. 오후에 외부일정이 있는 센터장님이 내 자리로 걸어왔고 나는 벌떡 일어났다. 이게 우리의 마지막 인사라는 걸 센터장님도 나도 잘 알고 있었다.


"센터장님, 그동안 제가 너무 패기 넘쳐서 죄송합니다.. 많이 곤란하셨죠?"

"아니에요 서율씨, 경영진의 한 사람으로서 제가 미안합니다.. 그래도 우리 마지막인데 웃으며 인사해요"


센터장님은 환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었고 나도 환하게 웃으며 악수했다. 짧은 악수를 마치고 센터장님은 이내 뒤돌아서 걸어가셨다. 매일 보던 센터장님의 뒷모습이 이제 마지막이라니.. 그가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지자 갑자기 눈물이 터져버렸다.


내 사정을 듣자마자 단박에 채용사기의 증거들을 프린트해서 부사장실로 뛰어올라간 센터장님, 사장실로 불려 가 깨지고 와도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웃어 보이던 센터장님..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처럼 싸우던 나도 정든 사람과의 이별에서는 단번에 무너져 내렸다.

아직 인사를 돌릴 사람들이 많이 남았는데 파티션 뒤에 숨어서 한 시간 내내 멈추지 않는 눈물을 수습하느라 애를 먹었다. 겨우겨우 남은 사람들에게 인사를 돌리고 책상을 정리해 짐을 챙겨 나오는데 고작 쇼핑백 하나에 짐이 모두 담기는 걸 보니 애초부터 이곳은 내 자리가 아니었나 보다.




그런데 이상한 건, 서른여섯에 아무 대책 없이 퇴사를 하는데도 자꾸만 알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진짜 내 자리가 어딘가에 마련되었고 그 자리로 보내기 위해 온 우주가 나를 이 조직에서 밀어내는구나” 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확신은 너무나도 강렬해서 이미 사실처럼 느껴졌다. 마치 미래에서 오는 메시지를 직감적으로 느끼는 '노잉'같았다.


두 달간의 분쟁에 너무 체력소모를 많이 해서, 퇴사 후 며칠간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쉬었고. 몸이 재정비되자 취업포털사이트에 들어가 그동안 써온 나의 이력서를 들여다보는데 지난 10년간의 이력이 빼곡히 적혀있는 사무직 이력서 밑에 쓰다만 이력서가 하나 더 보여 클릭해 보니 아주 오래전 잡지사 에디터 시절에 쓰던 이력서가 남아 있었다.


어린 나이에 서툰 열정으로 써 내려간 자기소개서를 읽는데 너무 귀여워서 웃음이 나왔다.

나는 수정 버튼을 눌러 2012년에 멈춰있는 이력서를 이어서 쓰기 시작했는데 놀랍게도 최근 2년 동안 작가로 활동해 온 이력으로만 A4용지 한 장을 빽빽하게 채울 수 있었다. 2년이라는 짧은 기간 안에 방대한 분량의 원고와 이력들을 만들어 냈다는 걸 이력서를 완성하고 나서야 비로소 깨달았다.


채용사이트 검색창에 '시나리오 작가'를 검색하니 온갖 재미있어 보이는 직장들이 가득했다. 그동안 심심할 때마다 머릿속을 스치는 스토리들을 시나리오로 써왔는데 그걸 파일로 모아 정리해 보니 취업에 사용할 수 있는 그럴싸한 포트폴리오가 되었다.


대기업을 나가면 굶어 죽을 줄 알았는데 오히려 무궁무진한 세계가 눈앞에 펼쳐졌다. 마치 삶의 터전이었던 삭막한 공장을 벗어나니 형형색색의 꽃길이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기분이었다.


생각해 보니 이 쓰레기 같은 회사와 인연이 닿아 취업사기를 당한 건 철저하게 계획된 나의 운명이었다.

9년 전, 재미로 사주를 보러 갔을 때 30대 중반에 다시 글을 쓰게 될 거라는 예언을 들었는데 그때는 배고파서 때려친 글을 다시 쓸 일은 절대로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글은커녕 다이어리 한 권 쓰지도 않는 삶을 살다가 34살에 이 회사로 이직했는데 입사할 때 연봉 조건을 교묘하게 말장난해서 생각했던 금액보다 적은 연봉에 이미 한차례 인사팀과 분쟁이 있었다.

그때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이 너무 괴로워서 혼자 술을 마시며 책을 읽다가 갑자기 나도 글을 써보고 싶다는 충동이 들어 노트와 펜을 찾아와 술병을 치우고 그 자리에서 처음으로 글을 쓰기 시작했다.


그렇게 속 썩이는 회사 때문에 글을 쓰기 시작해서, 회사를 다니는 2년 내내 수많은 원고가 쌓여가며 여러 출판사에서 출간제의를 받았고, 마침 퇴사를 결심하고 분쟁을 시작할 때쯤 출판사랑 출간 계약을 맺었으며, 이번에 퇴사를 하면서 본업마저 시나리오 작가로 준비하고 있다니..


이 회사가 나를 꾸준히 속 썩이지 않았더라면 나는 작가가 될 생각조차 전혀 하지 못했을 거다.

쓰레기 같은 회사가 알고 보니 고작 2년 만에 내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준 정말 귀한 인연이었던 것이다.




잠시동안 감동을 느끼려고 하는데, 그 빌어먹을 귀한 인연한테 연락이 왔다. 퇴사해서 이번 성과급 지급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는 헛소리를 전하기 위해서였다.


원래 현재 퇴사를 했어도 작년에 만근 했으면 당연히 작년 기준으로 책정된 성과급이 지급되어야 하는데 역시 이 회사는 마지막까지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나는 인사팀 담당자에게 전화를 해서 항의했지만 담당자는 나중에 전화를 주겠다고 끊어버리더니 잠적했다.(아직도 여기가 대기업이 맞는지 너무 신기하다)


이미 퇴사를 했으니 이빨 빠진 호랑이겠지 싶어 무시하는 거였다. 하지만 나는 이런 변수를 대비해 그동안의 증거들과 사장한테 썼던 메일들을 모두 개인 메일로 옮겨두었고 곧장 다음날 오전 8시에 다시 사장에게 메일을 보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손서율입니다.
퇴사하고 나서 변수가 생길 걸 감안하여 최** 회장님과 모든 계열사 사장님들의 메일 주소를 메모한 채 퇴사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성과급을 단 한 푼도 지급하지 않겠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사장님의 채용비리 증거들은 언론사에 제보하여 기자와 이야기를 모두 마쳤고, 뉴스에 사장님 나오시는 건 제 동의만 있으면 바로 가능하니 시간문제입니다.  -중간 내용 생략-

금일 중으로 당연히 받아야 할 저의 성과급이 지급되지 않는다면 [**그룹 채용비리 KBS 언론보도 확정 / 회장님께 보고 드립니다] 라는 제목으로 차주 월요일 오전 8시 정각에 최** 회장님과 각계열사 모든 사장님들께 뉴스 보도내용과, 방송 예정 일자, 그동안의 증거들을 송부드리겠습니다.

이런 불미스러운 보고가 회장님과 계열사 사장님들 모두에게 송부되고 사장님께서 뉴스를 화려하게 장식하시는 불상사가 없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손서율 드림.


메일을 보낸 지 세 시간 만에 재무팀에서 전화가 왔다.


"안녕하세요, 서율씨! 메일 보내주신 거 잘 받았고요~ 저희 회사가 성과급 지급일자 기준으로 근무하는 사람만 지급되는데.."

"그런 게 어딨나요? 작년에 발생한 성과급이면 작년에 근무했던 사람들에게 모두 지급되는 게 맞는 거죠"

"아.. 서율씨 끝까지 들어주세요!! 저희가 원래는 사규에 어긋나는데 서율씨가 그동안 열심히 일한 노고를 감안해서 서율씨만 특.별.히! 지급해 드리기로 결정했습니다 하하하"


통화를 끊자마자 떼일뻔했던 성과급 몇백만 원이 통장으로 무사히 들어왔다.


지난 두 달 동안의 고된 개싸움은 결코 허투루 싸운 게 아니었다. 만약 내가 싸우는 걸 포기하고 나갔더라면 지금 항의 메일을 써봤자 전혀 먹히지 않았을 거다.

사장도 내가 한다면 하는 사람인 걸 아니까 메일을 보자마자 바로 입금하라고 시킨 것이다.




그리고 두 달 뒤, 나는 원하던 연봉에 가장 재미있는 업무만 하는 스릴러 시나리오 작가로 전직했다.


그동안 '진짜 내 자리가 어딘가에 마련되었고 그 자리로 보내기 위해 온 우주가 나를 이 조직에서 밀어내는구나' 확신하고 있었던 생각이 정말 미래에서 보내온 노잉이 맞았다.


삶을 통째로 뒤흔들던 대지진이 한바탕 쓸고 지나가자, 예정되어 있었던 인생의 2막이 시작되었다.

아무도 말해주지 않아도 나는 본능적으로 알 수 있다. 정해진 시간에 정해진 길을 따라 운명대로 걸어가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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