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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손서율 Jul 10. 2023

대기업 사장님 vs 파견사원    

당신의 세계관 속에서는 당신이 왕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며칠 전 나는 '역대 가장 화끈한 퇴사자'라는 글을 개시했다. 일개 파견직 임원 비서가 취업사기와 채용비리로 얼룩진 대기업의 부조리에 맞서 사장을 저격하고 언론을 타겠다며 회사를 발칵 뒤집어 놓았던 나의 경험담이었는데 글이 Daum 메인에 뜨면서 7만 회가 넘는 엄청난 조회 수를 기록했다.


글 밑에는 위로와 응원이 담긴 독자분들의 따뜻한 댓글이 많이 달렸는데 그중 유독 눈에 띄는 댓글이 있었다.

"우리 딸도 취준생입니다. 자꾸 세상에 꺾이는데 작가님처럼 당찬 사람이 됐으면 해서요, 컴맹인데 한참을 찾아서 구독했습니다"  


거친 세상 밖으로 딸을 내보내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까 싶어 한참 동안 PC 앞에서 헤매고 계셨을 엄마의 마음이 느껴져 가슴이 아려왔다. 그래서 조금이나마 더 도움을 드리고자 이번 글을 쓰게 되었다.




그렇다면 난 대체 어떤 인간이길래 대기업 사장이고 나발이고 내 할 말을 다하고, 전 직원이 수군거리든 말든 꿋꿋이 마이웨이를 갈 수 있었던 걸까?


나 또한 사회 초년생일 때는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요즘은 기업문화가 정말 많이 개선되었지만 10년 전에는 지금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인권유린이 난무하던 시절이었는데 누구나 다 아는 대기업에서 여직원 손에 술병을 쥐여주며 술시중을 시키기도 하고, 성희롱과 성추행은 점심시간에도 일어나는 흔한 광경이었다.


나는 회사를 옮길 때마다 외모가 빼어나다고 주목을 받았는데 그건 오히려 사회생활에 치명적인 독이 되었다. 아무리 단정한 옷차림으로 꽁꽁 싸매고, 남자처럼 행동해 봐도 어떻게든 틈새를 파고들려는 온갖 똥파리들이 주변에 득실거렸다.  


나는 대기업을 네 번이나 이직한 이력이 있는데

첫 번째 회사에서는 같은 팀 남자 대리의 일방적인 성추행으로 회사에 정당한 징계조치를 요구했지만 아무런 조치가 취해지지 않아 그때도 언론을 탄다고 발칵 뒤집어엎고 퇴사했고


세 번째 회사에서는 회계 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지나가다가 부사장을 마주쳐서 목례를 한번 했다가 그날 이후로 자신의 비서가 되라고 강요받았고 버티고 버티다 일 년 만에 굴복하여 비서직군으로 바꾸었더니 그때부터 교묘하게 찝쩍거리는 부사장 때문에 스트레스로 생전 처음 공황 증세까지 겪게 되었다.


그렇게 부사장을 피해서 네 번째 회사로 도망 왔는데 여기마저 정규직 전환을 내건 취업사기에 낚여서 분쟁이 생겼고 결국 대기업 사장님 때려잡는 역대 가장 화끈한 퇴사자가 되어 그 바닥에서 영원히 은퇴하고 작가로 전직했다.




나는 항상 초심을 잃지 않고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세상은 나를 한시도 가만두질 않았다.

총 네 번의 직장 생활에서 두 번은 성희롱과 성추행으로 퇴사했고, 한 번은 취업사기로 퇴사했으니 그나마 멀쩡한 직장 생활을 했던 회사는 단 한 곳 밖에 없었다.


사주에 이성이 꼬이는 도화살, 홍염살, 화개살이 쓰리콤보로 다 들어가 있다고 하던데 그게 문제인 건지 아무리 올바르게 살아도 남들은 겪어보지도 못한 온갖 해괴한 일들을 겪어야만 했다.


하지만 이런 힘겨운 인생을 살면서도 내가 강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었던 이유는 남들과는 조금 다른 생각으로 살아온 덕분이었다.

좀 신박한 생각인데 사실 나는 내가 여왕이라고 생각한다. 속세에서의 나는 아무것도 아닌 존재라도, 나의 세계관 속에서 만큼은 여왕의 신분으로 살고 있다.  


사람들이 까맣게 잊고 사는 게 있는데 우리가 진짜 모시고 살아야 할 사람은 직장 상사가 아닌, 나 자신이다. 내 삶의 모든 안건을 결정하는 최고 통치권자로, 평생 동안 내 인생을 경영해 주시는 여왕님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내가 대기업 사장과 맞다이를 뜰 수 있었던 이유는 나 자신이 여왕이라고 생각해서다. 속세에서의 신분은 파견직 임원 비서래도 나의 세계관 속에서는 엄연히 여왕이기 때문에 감히 여왕님께 무례하게 취업사기를 친 자들을 마땅히 벌한 것이다.


실무자들과의 면담은 증거를 만들기 위한 빌드업일 뿐이었다. 나는 여왕이라서 사장과 이야기를 해야 하는 사람이었고, 당시 사장이 내 요청에 응하지 않았다면 회장한테도 메일을 썼을 거다.




요즘은 정년도 짧아져서 평생직장이 사라졌기 때문에 회사의 갑질에 목매고 살 필요가 없다. 이번에 퇴사한 회사에 나와 같은 취업사기를 당한 동료가 있었는데 늦은 나이에 퇴사를 하면서 재취업을 걱정했지만 퇴사하자마자 두 달도 채 안 돼서 더 좋은 데로 취업했다. 이렇게 시야를 확장하고 좀 더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인생의 기회는 무수히 많다.


이 우주는 생각보다 풍요롭고 안전해서 마음껏 활동할 수 있는 무대인데, 우리가 느끼는 대부분의 위험 요소들은 아직 겪어보지 못한 불안에서 온다. 직장에서 퇴사하면 인생이 모두 끝날 것 같다는 생각에 말도 안 되는 갑질을 버티고 버티다 스스로 목숨을 끊으시는 분들이 종종 뉴스에 나오는데 너무나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대기업 사장이든 나발이든 모두 다 내 인생의 파노라마 중에 잠깐 등장하는 까메오일 뿐인데 말이다. 인생을 전체적으로 볼 줄 아는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면 결국 가장 중요한 건 나 자신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이런 마인드로 인생을 살면 그 누가 와도 자신의 소신을 지킬 줄 아는 사람이 된다. 나는 여왕이기 때문에 감히 나한테 무례한 말을 지껄이는 자는 곁에 두지 않게 되고, 누구보다 여왕님의 의견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에 남들의 가스라이팅에도 전혀 흔들리지 않는다.  


자신의 세계관에서 마저 신분이 낮은 사람은 무례한 대접을 받아도 그러려니 참는데 나는 왕족의 신분이기 때문에 “나는 귀한 신분이라 이딴 대접을 받을 사람이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면서 단박에 항의할 수 있는 것이다.


웃긴 건 과거 돈에 쪼들리던 시절에도 나는 잠시 몰락한 여왕이라고 생각했다. 요즘 절약 유튜버들을 보면 편의점 음식으로 연명하기, 라면으로 세끼 때우기 등의 짠테크 콘텐츠가 많은데

나는 몰락했지만 어쨌든 여왕님이기 때문에 그렇게 함부로 모실 수 없었고 투잡을 하던가 마통으로 여유자금을 잠시 땡겨와 품위를 유지했다. 어차피 나는 앞으로 큰일을 할 여왕님이라 그깟 돈 몇 푼에 절절매면서 살지 않았다.


나를 귀한 신분으로 생각하고 살면 내가 생각한 수준에 맞춰 살려고 하기 때문에 삶의 질이 자동으로 올라간다. 애초부터 신분이 천민이면 길거리에서 자고 아무거나 주워 먹어도 되지만 여왕은 몰락해서 유배를 가도 초가집이라도 지어주고 그 와중에 붓과 종이는 또 있어서 글도 쓰며 산다. 이렇게 최소한의 품위는 지키면서 왕족의 포스를 유지하기 때문에 열악한 환경에서도 기죽지 않게 된다.




10년 전 회사에서 성추행을 당했을 때도 나는 참지 않았다. 남들은 수치스럽다고 쉬쉬하다가 몇 번을 더 당하는 경우가 많은데 나는 "시발 내가 죄졌어?" 라는 생각으로 당시에도 녹취록을 따서 언론을 타겠다며 실장까지 면담했었다.


나는 단순추행 치고는 변호사를 고용해도 받기 힘든 액수의 합의금을 받고 퇴사했고 가해자는 회사에서 살아남아 잘 먹고 잘 사는 듯했으나, 그 후 몇 년이 지나 감사팀에 발령받고 한 달이 채 안 돼서 내 사건이 다시 화두로 떠오르며 감사팀에서 바로 퇴출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다. 감히 여왕님을 건드린 죄로 몇 년이 흐른 뒤에도 자신이 지은 업보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그때는 20대여서 미숙한 여왕이라 사장까지는 못 갔지만, 그 뒤로 10년이 지나 온전히 성장한 여왕이 될 수 있었고 "감히 여왕님한테 취업사기를 치고 채용비리를 저질러? 여기 사장 나와!" 를 외치는 역대 가장 화끈한 퇴사자가 될 수 있었다.  


이런 마인드로 살다 보니 세상이 나를 수없이 짓밟아도 기죽지 않는 강단 있는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었다.




우리는 자신의 세계관에서만큼은 왕과 여왕의 신분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들에게 갑질하는 왕과 여왕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왕족답게 그릇이 크고, 기품이 넘치지만 가끔은 단호하게 맞설 줄도 아는 그런 뼛속까지 고귀한 신분의 인간으로 살아야 한다.


당신의 세계관 속에서 당신은 무슨 신분으로 살고 있는가? 혹시 인생에서 잠시 스치는 까메오 따위를 왕위에 앉혀 놓고 모시고 있지는 않은가?


당신이 속세에서 어떤 신분으로 살고 있든

당신의 세계관 속에서만큼은 당신이 왕위에 앉아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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