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루어지지 못한 사랑
"일요일까지 나랑 만날지 대답해 줘
그때까지 대답 못한다면 다신 안 볼 거야"
다섯 번째 고백을 회피하자
그는 선포했고 나는 결국 항복했다.
그리고 우리는 연인이 되었다.
그를 만난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주변이 시끄러웠다. 내 주변 사람들이 보기엔 그는 정말 뜬금없이 나타난 의외의 인물이었다.
그는 나보다 세 살 연하로 라운지 바에서 근무하는 매니저였다. 그동안 내가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사업하는 사람이거나 나와 같은 직장인이었기 때문에 그는 직업과 나이 자체만으로도 화제가 되었다.
우리는 같이 있으면 외관상 잘 어울린다는 이야기를 참 많이 들었다. 웃음 코드도 비슷해서 함께 있으면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
하지만 그 부분 빼고는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달랐다. 내가 하루를 시작하는 시간에 그는 하루를 마무리했고 낮과 밤의 경계선만큼 우린 삶을 바라보는 시야도 달랐다.
어느 날 그와의 술자리에서 내가 물었다.
"너는 인생의 목표가 뭐야?"
그는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평생을 함께 할 사랑하는 사람을 찾는 거"
연애는 인생의 옵션이라고 생각하는 나에겐 너무나 시시한 대답이었다.
하지만 그에겐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하는 삶이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가치였다.
우리는 사랑을 주는 형태도 너무나 달랐다.
나는 그의 생일에 명품 스니커즈를 선물하고 새로운 여행지와 좋은 호텔, 좋은 레스토랑에 데려갔다.
그는 아직 해보지 못한 게 많았다.
내가 해보았던 좋은 경험을 많이 알려주고 싶었다.
그가 다니던 바가 어려워져 직장을 잃었을 때 나는 그를 위로해 줄 시간에 내 필력을 총동원해서 그의 이력서를 대필하여 낮에 할 수 있는 직장에 취업시키고
마침 나의 전 직장 하청업체여서 관련된 인맥을 찾아가 그를 추천하고 빠르게 승진시킬 수 있는 방법을 알아보았다.
난 그의 인생에서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싶었다.
반대로, 그는 참 아기자기하고 소박한 사람이었다.
이른 겨울 아침, 출근 준비를 마치면 미리 데워놓은 핫팩을 건네고 내가 몸이 아픈 날은 나을 때까지 곁에서 꼭 안아주었다.
그는 오랫동안 혼자 살아왔던 나에게 집 밥을 자주 해줬다. 꽃게 된장찌개, 주꾸미 삼겹살 볶음, 갈비찜, 김치찌개 등등
호텔조리학 전공답게 그의 손맛은 최고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가 해준 소울 푸드가 정말 많다.
고작 일 년 정도 그와 함께했지만, 그는 나에 대해서 너무 많은 걸 알고 있었다.
나의 확고한 취향, 작은 습관, 특유의 표정들 밝은 모습 뒤에 남들이 모르는 어두운 그늘까지 애정의 눈으로 봐야만 알 수 있는 것들을 그는 모두 볼 수 있었다.
그와 나는 서로에게 다른 세계관을 보여주었다.
그는 현실에 찌든 나에게 마음의 힐링을 주는 에세이였고 나는 그에게 노력과 집념을 부추기는 자기 개발서였다.
그렇게 우리가 일 년 정도 만났을 때쯤
그는 직업을 잃었을 때 만회할 마음으로 투자했던 주식을 실패하여 빚이 있다고 고백하였다.
돈을 빌려 달라는 소리를 차마 하지 못하고 있는 그에게 며칠 동안 고민하다 천만 원 가까이 되는 돈을 송금해 주고 반년의 기한을 주었다.
주변에서 미친 짓이라고 말렸지만 사람 보는 눈에 도가 튼 나는 그가 당연히 갚을 사람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로부터 며칠 뒤, 내가 먼저 그를 떠났다.
우리는 이별의 아픔이 가시기도 전에 커피숍에서 만나서 차용증에 지장을 찍고 서명했다.
"누가 보면 이혼 서류 쓰는 줄 알겠네" 나의 썰렁한 농담에 테이블을 감싸던 공기는 더 무거워졌다. 차용증만 쓰고 보내기엔 마음이 너무 아려서 치맥 한 잔으로 마무리하고 우린 각자의 인생으로 돌아갔다.
그 후 예상대로 매달 그의 이름으로 몇백만 원씩 입금되었다. 그는 기어이 내가 준 기한 내로 빌린 금액을 모두 상환하였다.
이에 그치지 않고 그 당시 취업했던 영업직에서 점점 두각을 나타내더니 지금은 내 월급의 두세배를 번다.
그는 빌린 돈을 모두 상환하고 난 후 나에게 찾아와 저녁을 사줬다. 나와 다시 시작하고 싶다고 했다.
'그'만큼 나를 사랑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다시는 없을 것 같았다. 그의 품도, 그가 끓여준 꽃게 된장찌개도 그리워졌다.
하지만 그의 옆자리는 내 자리가 아니다.
그가 일궈 놓은 예쁜 정원 속에서 잠시 동안 머물 순 있지만 나는 때가 되면 바다로 나가 멀리멀리 항해해야 하는 사람이다.
그 자리의 진짜 주인은 그의 작고 예쁜 정원을 함께 일구어 나가는 아기자기하고 마음씨 따뜻한 사람의 자리이다.
이건 우리 둘 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사실이었다.
나는 결국 그에게 돌아가지 않았고 지금도 여전히 그의 행복을 응원하고 있다.
그동안 내가 온 정성을 다해 멋지게 키워놨으니 그와 어울리는 멋진 여자가 데려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