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해를 되찾는 대신 행복에 집중하는 삶
SNS에서 이름 모를 드라마의 한 장면을 보게 되었는데 여주인공이 고급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다가 남긴 음식을 싸 달라고 직원에게 요구했지만 레스토랑 방침 상 테이크 아웃이 불가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사장님을 소환해서 클레임을 거는 장면이 나왔다.
대충 기억나는 대화 내용은
"죄송합니다 저희 가게는 밖으로 음식을 가지고 나갈 수 없습니다. 예전에 어떤 손님이 음식을 가지고 가셨다가 배탈이 났다고 보상을 요구하신 이후로는 안전상 테이크 아웃을 금하게 되었습니다. 저희 가게 방침이니 이해해 주세요"
라고 사장님이 이야기하자 여주인공은 당차게 이야기한다.
"손님을 처음부터 블랙컨슈머로 취급하는 거 아닌가요? 그리고 제 돈으로 산 음식인데 이 음식은 제 소유니 가게 밖으로 가지고 나갈 권리가 있는 거 아닌가요?"
더 이상 영상이 보기 싫어서 꺼버렸다. 드라마일 뿐이지만 듣는 사람까지 피곤해지는 상황이다.
그 드라마의 여주인공은 예전 내 모습과 비슷했다. 나는 성격이 정확한 만큼 그르다고 생각되는 상황에서 꼭 할 말을 해야 하는 사람이었다.
요즘 서점에 가면 "현명하게 거절하는 법", "착한 아이 콤플렉스 극복하기"등의 책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그렇게 착한 사람들을 위한 거절의 책들이 가득 쌓인 곳에서 열심히 뒤적이다
"욱하는 성질 죽이기"라는 책을 골라와서 읽던 나였다. 가벼운 에세이인 줄 알았는데 분노조절장애 정신질환을 다룬 책이어서 도로 가져다 놓았다.
그 넓은 서점에서 나를 위한 책을 결국 찾지 못했는데 나중에 내가 직접 출간해야겠다.
"손해의 미덕", "조금 더 부드러워지기", "클레임 참는 방법"같은 책이 필요한 나 같은 사람도 존재하니까
20대 시절엔 회사만 가도 화나는 일들이 가득했다.
업무 요청 메일을 보내도 며칠간 회신이 없어서 전화하면 온갖 짜증을 부리는 총무 팀 직원
개인적인 친분을 기준으로 품의서를 승인해 주는 재정팀 직원
매일 화장실 한켠에서 겟 잇 뷰티 찍느라 종일 화장대를 점령하고 있는 메이크업 요정부터 기분 묘하게 자꾸 위아래로 흘겨보는 옆 팀 여직원까지
회사를 벗어나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예의를 갖추어 "감사합니다" 인사해도 대꾸도 안 하고 접시를 내던지듯이 놓고 휙 돌아서는 직원
목적지 말하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부터 내쉬며 승차 거부하는 택시 기사님 등등
그럴 때마다 나는 항상 논리적으로 따져서 제대로 된 사과를 들어야 직성이 풀렸다. 정확하게 바로잡는 게 내가 손해 보지 않고 잘 사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문제는 잘잘못을 따져내는 과정들이 나에게 너무나 피곤하고 스트레스로 다가왔다.
반면 요즘은 내가 마지막으로 언제 화를 냈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평온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데
곰곰이 생각해 보니 주변이 변한 게 아니라 내가 변한 거였다.
이렇게 변하게 된 결정적인 사건이 있었는데
3년 전 일이었다. 당시 만났던 애인은 여러 분야의 사업을 운영하느라 매우 바쁜 시즌이었는데 온종일 야근을 하느라 나와의 데이트는 저녁 커피 술 모두 건너뛰고 자정이 가까운 시간이 돼서야 호텔에서 만났다.
그는 호텔에서까지 노트북과 서류를 바리바리 챙겨 와 자기 직전까지 일했고 이렇게 늦어지는 날은 어쩔 수 없이 룸서비스로 저녁을 때워야 했는데
그날은 너무 늦어서 룸서비스마저 주방이 마감됐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가진 거라곤 내가 사 온 와인 한 병뿐이었다.
다행히도 치즈 플레이트 메뉴 하나는 주문이 가능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와인에 그거라도 먹자는 생각으로 4만 원짜리 치즈 플레이트 메뉴를 시켰다.
치즈가 도착했는데 깜짝 놀랐다. 호텔 가격이라고 감안해도 4만 원이라는 가격에 비해 양이 너무 적었을뿐더러 그마저도 절반은 코스트코에서 파는 치즈볼 과자로 채워져 있었다. 치즈를 시킨 건데 치즈 뻥튀기 과자로 채워서 보낸 걸 보니 순간 짜증이 치밀었다.
"아무래도 이건 주방 마감하고 남은 재료를 모아서 대충 보낸 것 같아 클레임을 걸어야겠어"
"그냥 먹자 나 종일 일했잖아 너무 피곤해서 그럴 여력도 없어"
"이걸 그냥 먹자고? 아니 상식적으로 가격 대비 말이 안 되잖아"
"이 늦은 시간에 뭘 바래 어차피 내가 내잖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자"
그는 나를 겨우 말려놓고 내 렌즈 세척액 심부름을 하러 편의점으로 잠시 나갔다.
나가면서도 잊지 않고 한 번 더 소리쳐 말했다. "전화하지 마! 그냥 넘어가자고 했다"
그가 나간 뒤 씻고 샤워 가운으로 갈아입고 나왔는데 자꾸 그 치즈 플레이트가 눈에 거슬려서 견딜 수가 없었다.
나는 결국 수화기를 들었고 호텔 레스토랑에 전화를 걸었다.
"네 레스토랑입니다."
"아까 치즈 플레이트 룸서비스시킨 사람인데요 양도 너무 적고 과자로 절반이 채워져서 왔네요?"
"..........."
"듣고 계신가요? 주신 데로 그냥 먹으려 했는데 아무리 봐도 납득이 안 가서 전화드렸어요"
"주방이 마감되었다고 이미 공지를 드렸었는데요"
"마감이 무슨 상관이에요? 주방이 마감되었어도 돈을 받고 정식으로 판매하신 거잖아요 재료가 없으면 아예 팔지 않는 게 맞는 거죠"
"저희 지금 마감 다 했는데 필요하시다고 하시니 특별히 만든 건데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지금 본인 마감이 중요해요? 메뉴가 너무 부실하다고 말씀드리는 건데 더 이상 말이 통하지 않네요 내일 아침에 지배인님 찾아뵙고 말씀드릴게요 더 이상 저와 통화 안 하셔도 됩니다."
언성을 높이는 직원의 목소리가 끝나기도 전에 수화기를 거칠게 내려놓았다.
치즈 플레이트를 봤을 때 보다 기분이 열 배로 나빠졌다.
불행히도 사건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초인종 소리가 나서 애인이 돌아온 줄 알고 문을 열었더니 아까 통화했던 직원이 찾아온 거였다. 나는 샤워가운 차림으로 기가 막혀서 멍하니 쳐다봤는데
그는 자기가 나이도 어리고 욱하는 성질을 이기지 못해 자신도 모르게 큰 실수를 저질렀으니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사과했다. 그러더니 메뉴 또한 가격에 비해 부실한 게 맞다면서 현금 오천 원(?)을 건넸다.
3분 전까지만 해도 나에게 언성 높여 따져대던 그가 지배인 소리를 들으니 정신이 번쩍 들어 사죄의 오천 원(?)을 가지고 한 걸음에 뛰어 올라온 것이다.
제가 이걸 왜 받아야 하죠? 받고 싶지 않은데요? 그가 준 오천 원을 다시 건넸다. 그는 억지로 내 손에 쥐여주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며 강제 사과를 했고 나는 받지 않는다고 밀어내고 한참 동안 복도에서 샤워 가운을 입은 채로 그와 오천 원을 가지고 실랑이를 했다.
내가 생각해도 정말 최악의 그림이었다.
기가 막힌 최악의 타이밍에 애인이 등장했다. 그는 놀라서 뛰어오더니 상황 파악이 되고 나서 정말 질린다는 듯한 표정으로 오천 원을 동시에 쥐고 멍하니 쳐다보는 직원과 나를 번갈아 노려보더니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렇게 전화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해놓고 나갔는데 결국 일을 벌이고 만 내가 얼마나 진절머리가 났을지 찰나의 짧은 순간 그의 표정에서 모두 드러났다.
돈 낸 사람이 그만하자 했는데도 정확함을 따져 대느라 그날 저녁을 모두 망쳐버렸다.
내가 직원에게 주장한 내용은 모두 맞는 소리였지만 그 주장의 결과들은 처참했다. 손해를 입지 않기 위해 했던 행동이 오히려 나에게 가장 손해로 다가온 것이다.
직원이 돌아가고 나서 기어이 내손 위엔 구겨진 오천 원이 들려 있었다. 마치 내 자존심 같았다.
애인은 한숨을 쉬더니 이야기했다.
"그깟 몇만 원으로 네가 한 행동을 봐.. 여유를 가지고 살자 손해 좀 보면 어때 그냥 넘겨줄 때도 있는 거야 살다 보면"
사실이었다. 나는 고작 4만 원 가지고 정말 추한 그림을 만들어 냈다. 몇만 원에 나의 품위를 모두 포기한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손해의 미덕을 깨닫게 되었다.
손해의 미덕을 깨닫고 난 후 부정적이고 무례한 것들에 나의 시선이 머물지 않도록 컨트롤했는데 그로 인해 원래 엮였어야 했던 부정적인 운명까지도 못 보고 지나쳐 버리는 것 같았다.
덕분에 나는 항상 평온하고 즐거운 일상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는 나에게 어떠한 피해가 생겼을 때 빠르게 판단한다.
손해의 미덕이 필요한 일인지
끝까지 싸워내야 하는 일인지
대부분은 손해의 미덕이 적용된다.
마음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판단해 보면 부정적인 논쟁과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감수할 만큼 큰 피해가 아니기 때문이다.
길거리에서 양말 한 짝을 환불하네 마네 하며 멱살 잡고 싸우는 사람들을 본 적 있는데 승자 패자 관계없이 너무나 초라하고 처참한 싸움이었다.
나는 작은 손해 정도는 금방 잊어내고 나의 행복에 집중하는 품위 있는 삶을 살기로 했다.
무례한 호텔 직원이 나에게 큰 깨달음을 주다니 결국은 그마저 나의 귀인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