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장난 수도 덕분에 진리를 깨닫다.

제주도에서의 어느 날

by 손서율



그날은 무슨 일인지 등산을 싫어하는 내가 이른 아침 오름에 오르고 싶었다.


들뜬 마음으로 샤워기를 틀었는데 물이 나오지 않았다. 호텔 프론트에 전화를 하니 수도에 이상이 생겨 사람을 불러 고치려면 시간이 꽤 걸릴 거라고 했다.


화가 났다. 오랜만에 마음이 들뜬 계획이었다. 나는 오늘 젖은 풀 냄새 가득한 오름 위에서 반드시 아침을 보내야 하는 사람이었다.


프론트 직원에게 클레임을 걸었다. 그는 목욕비를 지불해 줄 테니 근처 대중목욕탕을 이용하는 건 어떨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대충 옷을 걸치고 프론트로 내려가 오천 원을 건네받았다.




허름하고 낡은 동네 목욕탕이었다. 퍼렇게 녹슨 샤워기와 세면도구를 보고 있자니 눈살이 찌푸려졌다. 이미 알몸인 나에겐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찝찝한 샤워를 마치고 나와 헤어 드라이기를 찾는데 동전 구멍이 달린 쇳덩어리에 낡은 드라이기가 묶여있었다. '요즘 시대에 동전을 넣고 쓰는 드라이기가 있다니..' 혹시 몰라 카드지갑을 이리저리 뒤적였지만 동전은 있을 리가 없었다.


목욕탕 주인 아주머님께 동전 하나를 구걸했다. 짜증 섞인 표정으로 백 원짜리 동전을 꺼내 주셨다. 백 원을 삼킨 드라이기는 5분도 안 돼서 꺼졌다.


물기가 채 가시지 않은 부스스한 머리와 민낯으로 목욕탕을 나서면서 호텔에 돌아가서 드라이를 마저 하고 서둘러 오름에 갈 거라고 다짐했다.


갑자기 살짝 흐렸던 하늘에 뜬금없는 굵은 빗방울이 떨어졌다. 한두 방울 투두둑 떨어지더니 갑자기 솨아아아 하는 소리와 함께 순식간에 앞이 보이지 않는 무서운 소나기로 돌변했다.


당장 비를 피할 곳은 아무 데도 없었다. 무겁고 둔탁한 소낙비에 나는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그대로 다 맞을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처마를 찾은 나는 그곳에 서서 비가 그치길 기다렸다. 20분가량의 춥고 고된 시간이었다.


비에 젖은 생쥐 꼴로 호텔 로비를 지나 방으로 돌아왔다. 욕실에 들어가 샤워기를 틀어보았더니 그 사이 수도 점검이 모두 끝났는지 따뜻한 물이 펑펑 나왔다.


시간은 이미 정오에 가까워져 있었다.


기가 막혀서 웃음이 나왔다. 오름은 내일도 모레도 언제든지 갈 수 있었다. 샤워기에 물이 나오지 않았을 때 나는 다시 침대 속으로 들어가 여유롭게 늦잠을 청하거나 따뜻한 커피 한 잔을 끓여와 책을 읽으며 기다리면 됐는데 내 계획이 틀어지는 기분이 싫어 고집을 피우다 이렇게 생고생을 한 것이다.




살다 보면 이렇게 내 의지와 다르게 상황이 흘러가는 경우가 많다. 그럴 때 나는 상황을 바꾸려 부단히 애를 써왔다. 그래도 상황이 바뀌지 않으면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다.


가끔은 아무리 열심히 노를 저어도 거세게 흐르는 물살에 내가 가고자 했던 반대 방향으로 배가 움직일 때가 있다. 그럴 땐 손에 쥔 노를 내려놓고 물살이 이끄는 데로 가만히 풍경을 감상하는 여유도 있어야 한다는 걸


제주에서의 어느 날 문득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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