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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이 피눈물로 만들어준 '엄청난 선물'

by 손서율




"이 매니저,

박원순 미투 사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

요즘 세상이 이상하게 돌아가고 있어"


"내 대학 동기도 대기업 임원인데 술 먹고 여직원한테 전화로 사랑한다고 몇 마디 했다고 잘렸다니까? 두세 통인가? 밖에 안 했데 근데 인생 아예 말아먹었지, 그 자식 열심히 살았는데 너무 하지 않아?"


그의 이야기에 나는 침묵을 택했다. 그저 가끔 고개를 끄덕이거나 창문을 바라보았다. 날씨는 좋았고 무릎에 얹어진 햇살이 따스했다.


직장 생활 8년 차

아직 싱글인 34살 여자 '이 매니저'는 나다.





나의 지난 8년간의 직장 생활을 돌아보았다.

2013년 당시 26살인 나는 대기업 말단 사무직의

그저 평범하고 어린 여사원일 뿐이었다.


어느 날 퇴근 시간이 가까울 무렵 부장님이 오시더니 우리 팀 회식이 갑자기 생겼으니 따라 나오라고 하셨다. 남은 일을 급하게 마무리하고 부장님 뒤를 따라나섰는데 도착해보니 처음 뵙는 다른 본부 부장님들이 모여있었다. 어리둥절한 나에게 부장님은 술병을 손에 쥐여주며 한 분씩 따라드리라고 했다. 영문도 모른 채 그들에게 술을 따르고 있는데 옆 테이블의 따가운 시선과 수군거림이 느껴졌다. 결국 그날 팀원은 아무도 오지 않았다.


또 다른 날엔 본부 회식을 하는 날이었는데

한 시간도 안 돼 얼큰하게 취한 소장님이 갑자기 내 자리로 와서는 뒤에서 와락 끌어안았다. 당연히 소장님을 끌어낼 줄 알았는데 사람들은 나를 끌어내서 식당 한편 룸에 밀어 넣더니 이곳에 숨어 있다가 회식이 끝날 때쯤 나오라고 했다.


어떤 날엔 부장님이 여직원에게 주말에 뭐 했는지 물었다. 그녀는 여행을 다녀왔다고 했다.

"여행? 남자 친구랑 간 거 아니야? 손만 잡고 잔 거 맞아?" 옆에 있던 남자 대리는 "손만 잡고 잤겠어요? 부장님?" 했고 그 소리를 들은 모든 남자 직원들은 다들 껄껄 웃어댔다.


약자에게 행해지는 언어폭력은

공적으로 당연하게 행사되었다.


상처투성이인 나는

결국 내 손으로 사직서를 쓰고 나왔다.

유일하게 내 편이었던 남자 사원은 내가 퇴사하는 날 본사 정문까지 따라 나와 근처 스타벅스에서 급하게 사 온 텀블러를 건네면서 그동안 지켜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며 눈물을 흘렸다. 나도 손에 들고 있던 박스를 내려놓고 그를 붙잡고 한참을 함께 울었다.




이 이야기는 고작 8년 전인 2013년도에 누구나 아는 대기업 건설사 내에서 행해진 일들이다.

그때는 여자 직원이라는 이유만으로 성희롱과 성추행이 난무했고 회식 때 여직원을 접대부처럼 쓰던 미개한 기업문화가 만연했다.


미투 운동은 2018년도부터 국내에서 이슈화되기 시작하더니 법조계, 문단계, 연극계, 정치계까지 뻗어 나갔다. 성추행 피의자들은 줄줄이 언론의 단두대에 올랐다.

나는 그녀들의 용기 있는 투쟁에 보탬 하나 해준 게 없었다. 그저 평소와 다름없이 저녁을 먹으며 뉴스를 보고 '와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구나' 하고 감탄할 뿐이었다.




아무것도 해준 것 없는 나에게 그녀들은 피눈물을 흘려 만든 엄청난 선물을 주었다. 매일 출근할 때 나를 감싸주는 '투명 보호막'이다.


미투 운동 이후로 기업들은 성희롱 의무 교육에 박차를 가했다. 사람들의 인식은 빠르게 개선되었고 아직도 업데이트되지 못한 미개한 인간은 투덜거리지만 투명 보호막 속에 있는 나를 건드릴 수 없었다.




"매니저님 혹시 남자 친구 있어요?"


"에이 이 사람아! 그런 거 물으면 실례야 요즘"


"아닙니다 팀장님 저 없어요~

괜찮은 사람 있으면 소개 좀 시켜주세요 하하"


그녀들이 선물해 준

그저 무탈하고 평화로운 일상에

나는 매일 감사 인사를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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