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대로 안 되는 건 당연한 거야

포기하는 게 괴로운 사람들에게

by 손서율


"여기로.. 올라가야 한다고? 실화야..?"


경사가 표기되지 않는 지도상에서는 ○○역에서 5분 거리 부동산이었는데 그 5분(?)이라는 길은 끝없이 이어지는 가파르고 험난한 언덕을 올라야 했다.


"와.. 이건 빡쎄게 등산하는 수준인데 대체 여기서 어떻게 산담..?"


말을 내뱉기 무섭게 동네 주민분들이 나를 제치고 마치 산양 때처럼 가파른 언덕을 휙휙 잘도 올라가신다. 거친 숨을 몰아쉬며 부동산 문을 열고 들어섰더니 중개사 아주머님께서 반겨주셨다.


"아까 전화 주신 아가씨? 잘 찾아오셨네요~"


"네 지도 보고 왔어요 근데 여기는 경사가 엄청나네요? 올라오는 길이 너무 힘들었어요"


"무슨 소리예요? 여기는 겨우 초입이에요 위로 한참 더 올라가셔야 하는데.."


"예...??"


"우선 따라오세요"




엄청난 경사의 언덕을 한참 동안 올라왔는데도 이제 겨우 초입이었다니.. 젊은 사람 무색해지게 중개사 아주머니는 가파른 언덕을 슝슝 잘도 올라가셨다.


"여기 살면 체력이 늘 수밖에 없겠네요"


"그럼요~ 이게 바로 웰빙라이프죠 살다 보면 금방 익숙해져요 저도 이 동네 살거든요~"


숨 고를 틈도 없이 아주머니 뒤꽁무니를 따라 한참을 더 올라갔더니 다 무너져가는 낡은 빌라 단지가 나타났다.


5미터 간격으로 빽빽하게 들어찬 빌라들 틈 사이로 올려다본 좁은 하늘마저 흉물스러운 전깃줄이 잔뜩 얽힌 채 아무렇게나 걸려있었는데 예전에 마카오 여행 갔을 때 보았던 빈민촌과 너무도 닮은 풍경이었다.


"다 왔어요 여긴 전세 1억 6천 짜리 집이에요~"


"음... 이.. 이국적이네요 (= 마카오 빈민촌이 떠오르네요)"


멍하니 둘러보다 나도 모르게 내뱉은 이국적이라는 대답에 아주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시면서 계단을 올라가셨다.


"아~ 계단에 불이 안 들어오네요 아직 수리가 안되었나 보네.. " 아주머니는 민망하신지 웃음 지으며 말씀하셨다.


지도에서 보았던 ○○역에서 10분 거리 집은 10분 내내 어마어마한 경사의 언덕을 등산해야 했고, 매물 사진으로 보았던 화이트 톤의 넓은 투룸은 다 무너져 가는 빌라에, 불조차 들어오지 않는 암흑의 계단을 지나 공중화장실 문으로 착각할 정도의 초록색 페인트칠이 흉물스럽게 벗겨진 좁은 쇠문을 열어야 사진 속에서 보았던 내부만 리모델링해놓은 화이트톤의 투룸이 나타났다.


"연.. 연락드릴게요" 영혼이 1g도 담기지 않은 말투로 중개사 아주머님께 인사를 드리고는 하산하고 있는데 산 아래 맞은편에 아파트가 보인다.


"그래..! 저 정도는 되어야 살만한 집이지" 네이버에 아파트 이름을 검색해 보니 [전세 시세 7억]이라고 뜬다.


"미친..." 조용히 한마디 내뱉고 집으로 돌아왔다.




올해 이직하면서 집과 회사가 너무 멀어져서 도저히 이사를 안 갈 수가 없었는데 아무 연고도 없는 곳에 집을 구하려 하니 동네 분위기나 치안을 살피려면 직접 가서 둘러보며 발품을 파는 방법밖에 없었다.


○○역의 경험을 토대로 내가 찾아야 할 집의 조건이 추려졌는데


1. 평수가 좁아도 신축이어야 한다.


2. 치안이 좋고 깔끔한 동네여야 한다.


3. 관리비를 많이 내더라도 건물 관리가 잘되어 있어야 한다 (2중 현관, CCTV 설치)


4. 역세권이며 평지에 있는 집이어야 한다.


5. 채광이 좋아야 한다.


내가 가진 예산으로 이 다섯 가지 여건이 부합될 수 있는 곳은 빌라나 주택보다 오피스텔이 더 적합했다. 부동산 어플을 다시 뒤적여 보는데 ☆☆역이 딱이었다.


☆☆역은 역 근처가 온통 오피스텔로 가득했고, 주변에 백화점과 영화관이 들어서 있어 도보로 모두 이용이 가능했다. 가격 또한 역세권 신축 오피스텔을 2억 안에서 해결할 수 있다니.. 진즉에 이곳으로 알아볼걸!!


신나는 마음에 ☆☆역에 있는 여러 부동산에 전화를 싹 돌려서 방문 약속을 잡아 놓고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는데 마침 친한 동생에게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언니 뭐해?"


"나 내일 집 보러 가려고~ 부동산에 전화 돌리고 있었어"


"오~! 어디로 알아보는데?"


"☆☆역 근처 오피스텔~ 가격 대비 좋은 데가 많더라고?"


"헐.. 언니 거기 내 전 남친 오피스텔 성매매했다가 걸려서 헤어진 데잖아.. 그 동네 오피스텔.. 성매매하는 곳 진짜 많고 앞에 죄다 룸살롱에 술집이야.. 거기는 주거 단지가 아니라 윤락가야.."


"어....?"


"이 언니 큰일 날 뻔했네.. 멋모르고 거기 들어가서 살았어 봐! 성매매하러 온 손님들이랑 같이 엘리베이터 타고, 옆집에서 성매매하고 있고, 옆집 손님들이 주소 잘못 찾아와서 언니 집 초인종 누른다고 생각해 봐! 이쪽에 연고가 없으니까 전혀 모르는구만.. 앞으로 나한테 먼저 물어보고 알아봐!"


동생의 이야기를 들으니 온몸에 소름이 끼쳤다. 어쩐지 싸더라.. 그래 적은 돈으로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는 게 그렇게 쉬울 리가 없지..


전화를 끊고 다시 부동산에 전화를 돌려서 잡아놓았던 약속을 모두 취소했다.




요즘 같은 전세 대란에 적은 예산으로 내가 원하는 여건이 모두 충족되는 집을 찾는 건 정말 힘든 일이었다.


사무실에서, 지하철에서, 글을 쓰던 도중에도 나는 수시로 부동산 어플에 들어가 물건이 새로 나온 게 있는지 확인했고 마음에 드는 집이 간~혹 나와 연락을 해보면 방금 나갔다고 하던가, 중개사의 착오로 가격이 달랐다던가, 계약만을 앞두고 있는 와중에 집주인의 변심으로 갑자기 대출을 끼고 진행하지 않겠다고 통보받던가... 몇 달간의 무수한 헛걸음 속에서도 나의 집은 나타나지 않고 있었다.


그렇게 여러 번의 기회를 놓치다 보니 독기가 바짝 오를 대로 올라 하루 종일 부동산 어플만 들여다보며 검색하고 또 검색해서 드디어 내가 원하는 모든 조건에 부합하는 오피스텔 한 곳을 기적같이 찾아냈고


지금 계약이 가능하다는 중개사님의 대답을 듣자마자 일하던 것도 다 때려치우고 회사에 오후 반차를 통보(?) 한 후 부동산으로 향했다.


가자마자 거두절미하고 집부터 보았는데, 이 시세에 나온 게 의아할 정도로 완벽한 집이었다.


1. 역세권 1분 컷, 회사에서 15분 거리

2. 완벽한 주거 목적의 동네

3. 치안 좋음

4. 신축 오피스텔 (관리 상태 최상)

5. 혼자 살기 충분한 평수

6. 채광 좋음


이 집을 주시겠다고 그동안 눈 빠지게 눈품팔고 다리 빠지게 발품팔아 이렇게 생고생을 시키셨구나.. 역시 노력하면 안 되는 게 없어! 하늘이 다 알아주잖아? 나는 감격에 겨워 하늘을 우러러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지금 계약할게요!"

그렇게 중개사 아주머니와 함께 부동산 사무실로 곧장 돌아와 계약서를 쓰기 위해 테이블에 앉으려는 순간!


"딸랑~"

사무실 문에 달아놓은 작은 종소리가 들려 돌아보니 한 모녀가 들어왔다.




"어머 오셨네요? 이를... 어쩌지..?"

중개사 아주머니는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왜요?"


"저분들 아가씨가 계약하려는 집, 오늘 아침에 보고 가신 분들인데 다시 오셨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지금 계약서 쓰려던 참인데 제가 계약하는 게 맞지 않나요?"


"저분들이 집을 먼저 보셔서.. 이해 좀 해줘요"


"집을 먼저 보는 게 무슨 상관이에요? 먼저 계약한다고 말한 사람이 계약하는 거 아닌가요?"


"너무 미안해요 저분들이랑 해야 될 것 같아, 아가씨는 대출을 끼고 하니 시간이 걸리지만 저분들은 대출 한 푼도 안 끼고 하셔서..."


"그게 말이 되나요..? 지금 막 계약서 쓰려던 참이었잖아요"


"미안해 아가씨.. 다른 물건 있을 때 말해줄게"


"아니요, 제가 분명히 계약한다고 먼저 말했어요 인정할 수 없어요"


"아가씨 미안해.. 어쩔 수가 없어 나도"


사무실은 한참 동안 정적이 흘렀다. 나는 이 상황이 기가 막혀서 넋 놓고 서있었고, 그저 먼저 보았던 집을 계약하러 들어온 모녀는 죄인이 되어 바닥만 들여다보며 앉아있었으며, 중개사 아주머니는 안절부절못한 채 내 눈치를 살피고만 있었다.


중개사가 귀찮게 대출 끼고 하는 나와 계약하기 싫다는데 항의해 봤자 별 수 없어서 결국 힘없는 발걸음으로 사무실을 나왔다.




부동산 가는 길에 눈앞에 있던 지하철을 놓치지 않았더라면... 중간에 화장실을 들리지만 않았더라면... 집을 꼼꼼히 볼 시간에 부동산 사무실에 5분만 빨리 도착했다면...


계약서를 꺼내 책상에 앉으려던 순간 들어온 모녀, 단 1초의 그 간발의 타이밍이 너무나 억울하고 기가 막혀서 눈물이 쏟아졌다.


차라리 그 집을 보여주지나 말던가.. 아니면 그 모녀가 더 일찍 와서 내가 납득할 상황이었다던가.. 이건 단순히 운이 안 좋은 걸 떠나서 신의 장난질에 제대로 농락당하는 기분이었다.


"나는 최선을 다해 노력했는데.. 왜 이런 일들이 생기는 거지..?"


가슴 뜨겁게 끓어오르는 분노의 감정이 주체가 안돼 집으로 돌아갈 기분도 아니었고, 마침 눈앞에 보이는 작은 하천으로 내려가 벤치에 앉아 멍하니 물속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팩소주를 하나 까야 하나 고민하던 무렵, 문득 예전에 들었던 법륜스님의 말씀이 떠올랐다.


"우리가 원하는 것이 다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다 안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에요? 다 안 이루어지는 게 정상이지요 근데 우리는 원하는 게 다 이루어질 수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괴로운 게 아니에요 세상이 내 뜻대로 돼야 된다고 잘못 생각하기 때문에 괴로운 거예요, 이 세상 일이라는 거는 사람이 원하는 대로 다 이루어질 수 없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괴로워할 일이 아니에요 안되면 어~ 안됐구나 이러면 돼요


그래도 하고 싶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한 번 더 하면 돼요


그런데 두 번 할 힘이 없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그만두면 돼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어떻게 하면 된다? 한 번 더 하면 돼요


두 번 해도 안되면 어떻게 하면 된다? 그만두면 돼요


그래도 미련이 남으면? 한 번 더해보면 되는 거예요 괴로워하지 말고!"


-법륜스님-




법륜스님의 말씀을 떠올려보니 그동안 세상의 모든 일들은 내가 간절하게 기도하고 노력하면 모두 이루어질 수 있다고 잠시 착각하고 있었다.


그래, 세상이 어떻게 내가 원하는 대로만 돌아가겠어.. 지금은 아주 진절머리가 나서 잠시 그만두지만 다시 미련이 생기는 날, 한 번 더 해보겠어!


팩소주 없이도 집으로 돌아갈 힘이 생겼다.

벤치에서 벌떡 일어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나지막하게 되뇌었다.


"안 되는 건 정상이야, 잘못된 게 아니야

기운 날 때 또 해보자, 괴로워하지 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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