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이라는 퍼즐에 정확히 끼워 맞춰지는 기적 같은 기회
"아가씨, 물어봤는데 집주인이 전세금 낮출 생각은 없다고 하네요.. 미안해요 다른 집을 찾아보셔야.."
전세금 조정이 가능할 것 같다는 중개사님 말씀을 믿고 이틀을 꼬박 기다려 받은 답변이었다.
"예.. 어쩔 수 없지요.. 고생하셨어요 감사합니다."
통화 종료 버튼을 누르자마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진짜 못해 먹겠네 이사 안 가고 말지.. "
4개월 내내 최선을 다해 발버둥 쳤지만 결국 주어진 예산안에서 마음에 드는 집을 구하지 못했다.
셀 수 없는 실패로 더 이상 남아있는 에너지도 없고 진절머리가 나서 다 때려치우고 싶다.
씩씩거리며 부동산 어플을 다시 열어본다.
대부분 이미 알던 집들이다. 하도 들여다봤더니 이 집은 2개월 전에 떠있던 거고, 이 집은 일주일 전에 떠있던 거고.. 줄줄이 외워서 내가 중개사 해도 될 것 같다.
홧김에 조건에도 맞지 않는 새로운 매물 두세 군데에 무작위로 문의 연락을 넣어버렸다.
그로부터 10분 뒤,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방금 어플로 문의주셨던 ***부동산입니다. 문의 주신데 말고 새로운 매물이 방금 하나 떴는데 금액이 얼추 맞네요 ○○역 오피스텔이고 투룸에 옵션 좋고 수납공간도 많아요 두 시간 뒤에 다른 분들이 보러 오신다고 하시는데 그전에 오실 수 있어요?"
"제가 계약할게요 가계약금 얼마예요? 계좌번호 주세요"
"예..? 집도 안 보시고 계약한다고요?"
"네 그냥 할게요 어차피 두 시간 안에 못 가거든요"
"예...?? 진짜 하실 거예요?"
"얼마 넣으면 돼요?"
"아.... 좀 당황스럽네요.. 500만 원 우선 넣어주세요"
그렇게 나는 집을 보지도 않고 가계약금을 걸었고 며칠 뒤 계약서를 쓰러 가서야 집을 처음으로 보았는데 참으로 신기한 일이었다.
그렇게 만사를 제치고 달려갔을 때도 구할 수 없었던 내가 원한 모든 조건에 부합했던 집이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진즉에 포기했던 투룸 조건까지 플러스됐다.
그동안 집을 구하는 일에 필사적으로 매달렸지만 상황이 따라주지 않아 무수히 많은 기회들을 놓쳐왔다.
갑자기 집주인의 변심으로 대출을 끼고 진행하지 않겠다고 해서 무산된다던가, 중개인 착오로 전세금이 더 낮게 책정돼서 계약하지 못했다던가, 계약서를 쓰기 직전에 다른 세입자에게 집을 빼앗긴다던가, 그 외 금액은 맞아도 다른 부분이 마음에 들지 않아 인연이 되지 못한 수많은 집들까지..
그렇게 4개월 내내 머리를 쥐어뜯을 정도로 나를 괴롭게 했던 집 구하기 미션이 문의한 지 단 10분 만에 전화 한 통으로 허무하게 이루어진 것이다.
자포자기로 집도 안 보고 가계약금을 걸어버렸지만 막상 와서 보니 내가 원했던 모든 조건이 완벽하게 갖춰진 집이었고 내 예산을 초과하는 전세금이었는데 있는 적금을 모두 탈탈 털어 합해 봤더니 소름 돋게 딱 맞아떨어진다. 게다가 집주인이 3주 내로 이사 날짜를 꼭 맞춰달라고 하는데 그마저도 나의 여건에 부합했다.
마치 유리구두에 신데렐라 발이 꼭 들어맞는 것처럼 절묘하게 모든 상황들이 딱 맞아떨어졌다. 이 집이 나의 진짜 인연이었다.
"진짜 인연은 걸리는 게 없이 술술 풀려, 혹여나 장애물이 생긴다고 해도 금방 극복하게 되어있어"
문득 얼마 전에 자신과 딱 맞는 반려자를 찾아내 결혼에 성공한 친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비록 딱 맞는 반려자는 아직 못 찾았지만 나에게도 그간의 애써온 노력이 허무할 정도로 술술 풀리는 진짜 인연은 분명 있었다.
작년에 나는 한 외국계 회사로 이직하기 위해서 부단히도 애를 썼다. 그 집념은 대단해서 그 회사의 로고를 오려 침대 옆에 붙여놓고 매일같이 붙게 해달라고 두 손 모아 기도했다.
그러나 나의 간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3번의 서류 지원은 모두 무참히 떨어졌고 4번째 서류를 넣었을 때 지원수 초과라는 자동오류 문구로 더 이상 접수조차 되지 않았다.
그 회사 외에도 수많은 회사에 이력서를 넣었지만 몇백 대 일인 경쟁률은 너무나도 치열해서 면접장 문턱마저 밟아보지 못하고 떨어지기 일쑤였다. 그렇게 일 년이 지나고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졌을 때 모르는 번호로 걸려온 전화를 받게 되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등록해 놓은 이력서 보고 연락드립니다. OO기업에서 티오가 하나 생겼는데 적합한 인재라 생각해서 연락드려요"
"앞으로 서류에 붙지 못하면 면접장을 알아내 쳐들어가서 한 번만 면접 보게 해달라고 빌어볼까?" 이런 말도 안되는 생각을 진지하게 궁리하던 중에 지원을 하지 않아도 친히 면접장까지 모시겠다는 전화가 걸려온 것이다.
그렇게 나는 최종 면접까지 수월하게 통과하며 입사하게 되었고 그토록 바랬던 외국계 기업보다 더 좋은 워라벨을 가진 국내 기업으로 입사하게 되었다.
이 회사 또한 나의 진짜 인연이었던 것이다.
"조금만 더 빨리 알았더라면"
"조금만 더 열심히 해봤더라면"
"조금만 더 참았더라면"
"그 주식을 샀더라면"
"그 말을 들었더라면"
그동안 나는 간발의 차이로 놓쳐버린 수많은 기회들을 떠올리며 가슴을 치고 고통스러워했다.
그러나 간발의 차이라도 약간의 오차가 생긴다면 최종적으로 나와의 인연이 되지 못한다. 결국 그 기회는 애초부터 나와의 인연이 아니었던 거다.
내 자리가 아니었고, 내 사람이 아니었고, 내 돈이 아니었던 거다.
하지만 반대로 그 어려운 확률과 변수들을 모두 초월하고 같은 시간, 같은 공간, 같은 조건이 모두 맞아떨어지며 복잡한 내 인생의 퍼즐에 정확히 끼워 맞춰지는 기적 같은 기회들도 있다.
이 기회들이 내가 말하는 진짜 인연이다.
진짜 인연은 언제 불쑥 찾아올지 아무도 모른다. 단지 수없이 반복되는 실패와 절망을 견뎌내며 꾸준하게 노력을 유지해야 찾아오는데
마치 절대로 풀리지 않을 것 같이 꽁꽁 엉켜 있는 실타래를 풀고 또 풀다 지치면 잠시 쉬고, 다시 힘을 내서 또 풀다 보면 어느 날 실타래의 끄트머리 실이 내 엄지와 검지 사이로 쏙 들어오는 순간이 찾아오고 그 끝을 쭈~욱 잡아당기면 그간의 고생들이 무색해질 정도로 한순간에 실타래가 술술술 풀려버리는 것처럼 말이다.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다면 언젠가는 반드시 내 발에 꼭 맞는 유리구두 같은 진짜 인연이 찾아온다.
만약 내게 주어진 예산에 통상적으로 맞는 집을 찾았으면 나는 이미 이사한 지 몇 개월이 지났을 거다.
하지만 나는 욕심쟁이고, 그 욕심은 나를 꾸준하게 괴롭혔지만, 나는 언제나 내 눈을 사로잡는 예쁜 유리구두를 원했다. 신는 순간 짜릿한 전율이 느껴지는 내 맘에 쏙 드는 유리구두를..
그건 사람도, 직업도, 물건도, 세상 모든 만물과의 인연에 포함되는데. 사실 이렇게 사는 건 정말 피곤한 일이지만 내 취향에 딱 맞는 유리구두에 발을 넣는 그 짜릿한 순간을 잊지 못해 나는 또 부단히 애를 쓸 게 뻔하다. 그 특별한 순간의 강력한 훅이 종종 들어와 줘야 인생이 재밌으니까
희망을 놓지 않고 노력한 끝에 진짜 인연을 만나는 기적을 여러 번 경험하다 보니 포기하지 않는 마음의 근력을 키울 수 있었고
아무리 노력해도 내 손에 잡히지 않고 나를 괴롭게 하는 인연들은 어긋남으로 위장한 가짜 인연이라는 걸 이번에 깨달았다.
앞으로 놓쳐버린 가짜 인연에 대한 미련으로 가슴 아파할 시간에
이미 내 인생을 풍요롭게 만들어 주고 있는 진짜 인연이 된 모든 것들을 귀하게 여기고 감사하는 마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2021년 12월 24일
새롭게 이사한 따뜻하고 예쁜 집에서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트리를 꾸미고 스테이크를 굽고 매년 크리스마스 때마다 마시는 리슬링 와인을 곁들인 후 두 손 모아 감사의 기도를 올리고 있을 거다.
"그간의 고생들이 헛되이지 않게 잘 마무리되어 감사합니다"
"저와 꼭 맞는 진짜 인연을 찾아 주셔서 감사하고 또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