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생활이 4년을 넘기자, 점점 군중 속에 섬처럼 고립되는 기분이 들었다. 북적이는 사람들 사이에 있으면서도 나는 외로웠고, 문득문득 ‘여긴 내가 있을 곳이 아니구나’라는 생각이 들곤 했다. 처음엔 서울에 뼈를 묻겠다며 독하게 버텼지만, 시간이 갈수록 마음이 바뀌었다. “여긴 나 말고도 뼈 묻을 사람이 많겠지, 나도 지방으로 내려가 내 무덤자리를 찾아보자.” 그렇게 마음먹으니 행동은 또 빠른 내가, 곧바로 춘천 한림대 성심병원에 지원서를 냈고, 서울아산병원 출신이라는 이력 덕에 특채로 채용되었다.
그 병원에서 뜻밖의 인연이 시작되었다. 아이 아빠와의 만남이었다. 만난 지 2주 만에 그는 반지하다방에서 다방커피 한 잔을 앞에 두고, 이렇게 말했다.
“화려하진 않지만 행복하게 해 줄게.”
나는 커피를 홀짝거리다 조신하게 대답했다.
“네… 오빠.”
사실, 난 이미 마음을 뺏긴 상태였다. 매일 빳빳하게 다려진 와이셔츠를 입고, 단정한 차림새에 정직하게 생긴 얼굴, 조곤조곤한 말투와 법대를 나온 학벌까지. 오랜 병원 생활 속에서 꼬질꼬질한 의사들만 보아오던 나에겐, 이 사람은 마치 다른 세상 사람이었다. 의사에 대한 환상 따위는 애초에 없었고, 이 오빠는 뭔가 바르고, 정직하고, 깨끗하고… 그냥 믿어도 될 것 같았다.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에 나는 또 겁 없이, 모든 걸 걸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난 바보였고, 헛똑똑이었다.
그의 집은 ‘종갓집’이었다. 장손이고, 증손이고, 제사는 명절 빼고도 1년에 무려 13번. 그런데 그때 나는 아무것도 몰랐다. 이미 내 뱃속엔 아기가 있었고, 나는 이 아이를 무슨 일이 있어도 낳겠다고 마음먹었기 때문에, 종갓집이 뭔지도, 제사가 몇 번인지도 관심 없었다. 어려서 순진했고, 순진해서 겁이 없었으며,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시댁에서 살아야 한다는 말에도 그냥 “네” 하고 들어갔다.
그러나 그 집은 감옥이었다. 유일한 탈출구는 출근이었다. 임신으로 배가 불러오고, 몸이 무거워도 병원일을 놓을 수 없었다. 출근이 곧 나만의 숨구멍이었기에, 나는 끝까지 일했다.
첫아이 지민이를 낳을 때, 예정일은 이미 2주나 지나 있었다.
임신중독증으로 체중이 무려 35kg이나 늘었고, 내 몸은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유도분만을 위해 병원에 입원했지만, 다행히 진통이 스스로 찾아왔다.
그렇게 15시간. 지옥과 천국을 오가며 나는 아기를 기다렸다.
진통이 깊어지자, 나도 모르게 남편에게 애원했다.
“제발 수술해 달라고 말해줘… 나 못 참겠어…”
하지만 시어머님은 단호하셨다.
“수술하면 사주가 망가져. 참아야 해.”
병실 바깥, 창문 너머로 보이는 친정엄마는 울고 계셨다.
그 순간, 나는 두 엄마 사이에서 흔들리는 하나의 작은 생명체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마침내 지민이를 품에 안았을 때, 나는 세상을 다 가진 듯한 기분이었다.
이 작은 생명이, 내가 이제 ‘엄마’라는 걸 알려주었다.
하지만 그 감격도 오래가지 않았다.
몸조리는 고작 한 달.
친정집에는 하루도 가지 못했다.
곧장 시댁으로 들어가, 어머님의 손에 맡겨 산후조리를 했다.
감사한 마음이 들면서도, 미치도록 친정이 그리웠다.
엄마가 보고 싶었다.
나를 낳아주고, 나를 돌보았던 그 마음이,
지민이를 낳고 나서야 가슴 깊이 밀려들었다.
25살, 나는 그렇게 엄마가 되었다.
그리고 다시, 간호사가 되었다.
출산 후 복직을 앞두고, 선택의 순간이 찾아왔다.
어른들은 늘 물었다.
“일할래? 애 볼래?”
나는,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았다.
“일이요.”
돌이켜보면, 그 대답엔 수많은 감정이 뒤섞여 있었다.
엄마로서의 미안함,
아내로서의 책임감,
그리고 한 사람으로서의 자존감.
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나 자신을 잃고 싶지는 않았다.
그 시절, 나는 그렇게 일하러 갔다.
가슴에 젖은 돌처럼 앉아 있었지만,
나는 간호사 가운을 입고, 다시 사람을 살리는 일을 시작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지민이는 어느덧 나를 훌쩍 넘을 만큼 자라났다.
그 아이의 뒷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문득 그날의 분만실,
처음 울음을 터뜨리던 아이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 아이는 알까.
그 울음소리에 엄마가 얼마나 무너지고, 또다시 살아났는지를. 지금도 나는 여전히 일터에 나간다.
엄마이면서도 나를 놓지 않기 위해,
아이를 위하는 것이 곧 나 자신을 지키는 길임을 알기에.
어른들이 말하던 그 질문은, 결국 둘 중 하나만 고르라는 뜻이 아니었다.
나는 아이도, 나도 모두 포기하지 않고 살아내고 싶었다.
이제는 내가 지민이에게 묻는다.
“일할래? 너 하고 싶은 거 할래?”
그 아이의 대답은 분명히, 내 대답보다 더 자유롭고 당당하길. 그걸 위해, 나는 오늘도
엄마라는 이름으로,
간호사라는 이름으로,
나 자신으로, 한 걸음씩 나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