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엄마는 아들을 낳지 못하셨다.
그래서였을까.
내가 결혼 후 종갓집 맏며느리가 되어 살아가는 것을 지켜보시던 엄마의 가장 큰 걱정은
“저 애가 아들을 못 낳으면 어쩌나” 하는 것이었다.
첫째로 보석 같은 딸을 낳고, 둘째를 가졌을 때.
배가 불러올수록 나도 걱정이 커져갔다.
“또 딸이면 어쩌지?”
이런 고민 저런 고민, 마음이 쉬이 가라앉지 않았다.
임신 7개월 무렵,
‘경기도 구리에 있는 산부인과에서 성감별을 해준다’는 소문을 들었다.
망설임 끝에 어느 토요일, 시부모님껜 “아이랑 잠깐 나갔다 오겠다”라고 말하고 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부른 배에 아이까지 안고, 버스에 몸을 실은 채,
주소 하나만 달랑 들고 낯선 산부인과를 찾아갔다.
접수하고 진료를 기다리는 동안, 가슴이 두근거려 견딜 수가 없었다.
‘딸이면 어쩌지?’
‘엄마는 또 얼마나 속상해하실까.’
초음파를 하던 선생님께 조심스럽게 물었다.
“큰아이가 딸인데, 아이 쓰던 걸 그냥 써도 될까요?”
그러자 선생님은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요. 새로 준비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발차기를 아주 잘해요. 축구선수 해도 되겠어요.”
그 말 한마디에, 나는 정말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기뻤다. 병원문을 나서자마자
손에 꼭 쥔 핸드폰으로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엄마!! 나 아들이래! 내 뱃속에 아들이 있대!”
엄마는 울면서 말씀하셨다.
“잘했다, 잘했다. 장해!!”
내 기쁨보다 더 큰 울음이었다.
버스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나는 시부모님과 남편에게 기쁜 소식을 전했다.
“아들이래요! 뱃속에 아들이 있어요!”
시부모님은 환하게 웃으시며 나를 꼭 안아주셨다.
“귀한 종손이 왔구나.”
그 말과 함께, 내게 더없이 다정하고 따뜻하게 대해주셨다.
마치 배 속 아이만큼 나도 소중하게 여겨주는 듯했다.
결혼 후, 시댁에서 함께 지내는 삶은 늘 불편했다.
하지만 아직 나이도 어리고, 살림에도 익숙지 않은 내가 밖으로 나가 일을 해야 했기에, 어머님은 늘 이렇게 말씀하셨다.
“첫아이가 다섯 살이 되면, 그때 분가시켜 줄게.”
나는 그 말을 철석같이 믿었다. 그 약속을 믿으며,
서툰 살림살이도, 어설픈 시집살이도 묵묵히 견뎠다.
그리고, 결혼식 날 내게
“행복하게 해 주겠다”라고 속삭였던 남편의 약속을,
나는 여전히 믿고 있었다.
그 믿음 하나로, 나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있었다.
큰아이를 임신했을 땐 임신중독증으로 35kg이나 체중이 늘었다.
힘겹게 자연분만을 했지만, 모유 수유를 하면서 세 달 만에 쪘던 살은 모두 빠져 몸무게는 40kg까지 내려갔다. 집과 가까운 병원에서 일했기에, 젖이 돌 때쯤이면 어머님이 아이를 안고 병원까지 오셨다.
직원 휴게실 한편에서 급히 아이에게 젖을 물리던 순간들이, 나에겐 일상이었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그게 당연한 줄만 알았다. 의심도, 질문도 없이.
하지만, 나는 점점 행복과 멀어지고 있었다.
어느 순간부터 이런 생각이 스며들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왜 결혼을 하는 걸까?”
믿고 견뎠던 마음, 행복을 꿈꾸던 약속들이 조금씩 균열을 내기 시작했다. 임신 32주가 되었을 무렵.
퇴근길, 아랫배가 묵직하게 뭉치기 시작했다.
첫아이 때 겪었던 진통이 어떤 것인지 알기에,
나는 가진통과 진진통 정도는 구분할 수 있었다.
그건 진통이었다.
급히 다니던 대학병원 응급실로 향했다.
아직 분만 예정일까지 두 달이나 남았고, 아기는 작았다 첫아이때와는 다르게 몸무게가 6kg밖에 안 쪄서 어떤 사람들은 내가 배가 작아서 임신한 것도 모르고 있었다. 그랬기에 제대로 낳을 수 있을까, 두려움이 앞섰다.
그런데, 그보다 더 큰 문제가 생겼다.
아기가 역위였다. 자연분만은 불가능했고, 진통이 시작된 이상 응급 제왕절개를 해야 한다는 의사 선생님의 설명에 나는 두려움을 넘어 온몸이 얼어붙었다. 시부모님께 서운했던 일도 있었다.
첫아이를 낳을 때는 다인실에 입원했는데, 이번에는 굳이 특실로 입원시켜 주셨다.
배려라고 생각하기엔 어딘가 석연치 않았고, 왠지 모를 차별당하는 기분이 들어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나를 무너지게 한 일.
밤 10시가 넘은 시간, 응급 수술을 준비하고 있는데,
어머님이 병원 복도에서 단호히 말했다.
“조산이고, 사주가 안 좋다니까! 지금 수술하면 안 된다. 반드시 밤 12시가 넘어서해야 해.”
나는 할 말을 잃었다. 왜 지금, 아기를 생각해야 할 때
미신을 앞세우는 걸까.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어머님의 뜻을 꺾을 수는 없었고, 같은 의료인으로서 너무도 창피하지만 병원에 말도 안 되는 사정을 얘기하며 수술 시간을 늦춰야 했다.
결국, 자정이 넘은 새벽에야 나는 아기를 수술로 만날 수 있었다.
그런데, 수술을 마친 뒤 또 한 번 충격이 찾아왔다.
무통 주사가 없었다.
“모유수유를 할 거니까, 무통은 달지 않는 게 좋다”는 어머님만의 이유였다.
나는 온몸을 찢는 듯한 수술 통증과 훗배앓이 통증을
온전히 감당해야 했다.
그 고통은 진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였고 , 몸이 아픈 것보다 마음이 더 아팠다.
모든 게 억울하고, 모든 게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성별을 알았을 때는 그렇게 기뻐서 울었는데, 정작 저체중으로 태어나 인큐베이터에 들어간 거여운 내 아기를 나는 보러 갈 수 없었다.
깊은 늪에 빠진 것처럼 몸도 마음도 가라앉은 채, 일주일을 그렇게 버텼고, 아기를 한 번도 보러 가지 않고
그냥 퇴원했다.
남편이 말했던 “행복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
나는 매일같이 나에게 물었다.
올해도 지나가고,
내년쯤이면 그날이 올까?
아니면, 그냥 오지 않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