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간호사, 그 무게를 아는 사람”

by 손샤인

고된 시집살이에 하루하루가 버거웠지만, 그래도 감사한 것이 하나 있었다.

시부모님이 손주를 무척 사랑해 주셨고, 정성껏 돌봐주셨다는 점이다.

그 사랑은 내게 큰 위로였고, 견딜 수 있는 힘이었다.

육아와 병원 근무를 병행하며 마음이 지칠 때마다

아이를 향한 시부모님의 애정은 내 삶의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그러다 둘째를 임신했다.

당시 나는 3교대 근무를 하고 있었고, 점점 무거워지는 몸으로는 감당이 어려웠다.

결국 대학병원을 그만두고, 집 근처 내과 개인병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처음엔 참 평화로웠다.

대형 병원에서 수없이 겪었던 응급상황과 무거운 책임에서 벗어나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진 듯했다.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 평온은 오래가지 않았다.


임신 25주로 접어들 무렵

어느 아침, 건장한 체격의 중년 남성이 병원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고열로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그는 감기몸살이 심하다며 내원했고, 약물 부작용 여부를 묻자 단호히 “없다”라고 대답했다.


진료를 마친 그는 해열 목적으로 혈관 주사를 맞고 곧장 귀가했다.

그런데 30분쯤 지나 병원 전화가 울렸다.

“숨이 막히고, 말이 나오지 않아요.”

다급한 목소리. 그는 다시 병원으로 향했고, 원장님은 아미노필린 주사를 놓아 기관지를 확장시켰다.


잠시 후, 환자의 아내가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도착했다. 그리고 곧, 주사실에서 날카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임신 중이던 나는 놀라 배가 뭉치기 시작했고, 몸이 떨렸다.

갑자기 문이 열리고, 환자는 휘청이며 바닥에 쓰러졌다.

얼굴은 이미 청색증이 돌고 있었다.


같이 일하던 간호사 언니는 응급실 경력이 있었다.

그녀는 주저 없이 18 게이지 니들을 들고 환자의 목, 기도 부위에 직접 찔러 긴급하게 응급처치를 시도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119를 눌렀고, 당황한 원장님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채 서성이고 있었다.


다행히 구급차가 빠르게 도착했고, 환자는 다시 대학병원으로 이송됐다.

하지만 나에겐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게 남았다.

너무 놀란 난 그날 저녁부터 진통이 시작됐고, 결국 산부인과에 입원해 안정을 취해야 했다.

병상에 누워서도 떠올랐다.

푸르게 질리던 얼굴, 비명,

그리고 환자의 휘청이는 마지막 모습.


일주일 후, 출근한 병원 앞에는 ‘의료사고’ 피켓을 든 가족들이 서 있었다. 환자는 뇌사 상태였고, 가족들은 슬픔과 분노로 가득했다.


며칠 뒤, 평범한 하루처럼 출근해 접수를 받고 있던 그때. 흰 소복을 입은 사람들이 빈관을 들고 병원 안으로 들어왔다.

고인은 새벽에 세상을 떠났고, 그 가족들은 마지막 인사를 전하러 온 것이었다.


이미 환자는 이송 당시 호흡이 멈춰 있었고,

심장은 소생했지만 뇌는 손쓸 수 없는 상태였다.

나는, 이 일이 결국 비극으로 끝날 것을 알고 있었다.


문제의 약은 ‘사 루 소부로카농’이란 이름을 가진 해열진통 주사제였다.

그 일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해당 약물은 심각한 부작용 사례로 단종되었다.


환자는 스스로 “부작용이 없다”라고 말했지만,

그 자신조차 알지 못했던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났다.

기도가 부어오른 상태에서 아내가 가져온 물을 마시며,

그 물이 기도로 들어가며 결정적인 치명타가 되었다.


원장님은 “물을 주지 말라”라고 했지만,

아내는 그 말을 듣지 못했다고 했다.


진실이 무엇이든, 결과는 되돌릴 수 없었다.

의료사고로 인정되었고,

병원은 7천만 원의 합의금을 지급했다.


나는 혼란스러웠다.

고인의 생명을 금액으로 환산해 받아들이는 유족들,

그 금액을 줄이려 협상하던 원장님의 모습,

그리고 아무 일 없던 듯 돌아가야 했던 내 일상.


“내가 정말 이곳에서 계속 간호사로 일할 수 있을까?”


그 질문은 마음 깊은 곳에서 묵직하게 맴돌았다.


너무 많은 것을 알기에,

더 두렵고, 더 외롭고,

더 깊은 책임감을 안고 살아야 하는 직업.

그게 바로, 간호사라는 이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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