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운을 타고 장원급제(?)한 나는 졸업도 하기 전에 취업이 결정됐다.
1994년 10월, 서울아산병원 신규 간호사로 당당히 입사했다.
그때 아산병원은 그야말로 신세계였다.
병원 안에 은행, 노래방, 빨래방, 중식, 한식, 양식, 편의점까지!
“이런 병원이 다 있네?” 싶을 만큼 놀라웠다.
수안보에서 2주간 오리엔테이션 합숙을 마치고 곧바로 병동에 투입되었다.
내 첫 근무지는 성형외과.
요즘처럼 미용 목적의 수술이 아니라, 선천성 기형으로 삶의 질을 개선하고 생존을 위해 수술받는 환자들이 대부분이었다.
구개파열(언청이), 합지증(손가락이 붙은 경우), 다지증(손가락이 하나 더 있는 경우), 항문 폐쇄로 태어난 아기들 등……
대부분 어린 소아 환자였고, 책에서만 보던 사례들을 실제로 보며 내 마음속엔 한 가지 다짐이 생겼다.
“나는 앞으로도 미용 성형은 절대 하지 않겠다.”
나를 이쁘게 낳아주신 부모님께 감사하며, 흔한 쌍꺼풀 수술조차 하지 않았다.
하지만 꽃길이라 믿었던 병원 생활은 현실의 자갈밭이었다.
근무 후엔 친절 교육, 보수 교육, 온갖 교육들이 줄줄이 이어졌고, 쉬는 날도 마음 편히 쉴 수 없었다.
호기롭게 “뼈를 묻겠다”라고 외쳤던 나는 점점 지쳐갔고, 꽃길인지 진흙탕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간호사 국가고시도 코앞이었다.
공부하랴, 일하랴, 교육받으랴… 머릿속엔 온통 ‘집에 가고 싶다’는 생각뿐이었다.
스케줄이 조정되지 않아 졸업식에도 가지 못했다.
하지만 국가고시를 합격했을 땐 나 스스로가 대견스러웠다.
다만, 살이 빠지고 지쳐가는 내 몸이 마음처럼 따라주지 않았다.
첫 월급을 탔던 날이 아직도 생생하다.
원주에 내려가 엄마께 옷 한 벌 사드린다며 허세 가득 안고 ‘마담포라 양장점’에 갔다.
엄마는 내가 간호사 된 게 그렇게도 좋으셨는지, 온 동네방네 심지어 장 보러 가서 모르는 사람에게까지 자랑을 하셨다.
나 역시 “난 자랑스러운 엄마의 딸이야”라며 스스로를 다독이며 병원생활에 적응해 갔다.
그러던 어느 날, TV 뉴스에서 봤던 사고의 주인공이 내 환자가 되어 병동에 입원했다.
강남의 한 아파트에서 고등학생 네 명이 부탄가스를 불장난하다 폭발이 일어나, 그중 한 여자아이가 전신 30% 이상 4도 화상을 입었다.
감염 우려로 특실에 입원했지만, 집안 형편은 좋지 않았다.
그 아이는 친구들 중에서도 유독 심하게 다쳤고, 회복 가능성도 거의 없었다.
24시간 강한 마약성 진통제를 달고 있었다.
어느 날, 그 아이가 내게 조심스럽게 말했다.
“언니… 거울 좀 보여줄 수 있어요?”
하지만 나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얼굴의 피부는 이미 벗겨져 있었고, 의사로부터 ‘절대 거울은 보여주지 말라’는 지시가 있었기 때문이다.
“조금만 더 나아지면 그때 보여줄게.”
난 그렇게 화제를 돌리며 아이와 대화를 이어갔다.
입원 3일째 되던 날, 아이가 내게 말했다.
“언니… 오리온에서 새로 나온 젤리, 꿈틀이… 한 개만 먹고 싶어요.
내일 언니 올 때 꼭 하나만 사서 입에 넣어줘요. 그거 해주면, 나 치료 더 열심히 받을게요.”
아이의 그 말이 어찌나 마음에 걸리던지…
그날은 유난히 아이 곁에 오래 머물렀고, 퇴근 후에도 내내 마음이 불편했다.
다음 날, 혹시나 싶어 옷도 갈아입지 않고 병실로 달려갔다. 하지만 병실은 이미 비어 있었다.
간밤에 세상을 떠났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 아이는, 내가 처음 겪은 사망 환자였다.
감정을 드러내서도 안 되고, 흔들려서도 안 된다고 배웠다.
이런 일에 동요하면 다른 환자에게 사고가 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아무렇지 않은 척 일에 몰두했다.
그러다 결국… 참지 못하고 화장실로 달려가 엉엉 울었다. 그게 내가 아이에게 보내는, 조용한 작별 인사였다.
그 후로 난 예전의 나로 돌아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렸다.
지금도 편의점에서 꿈틀이를 보면, 그 아이가 떠오른다.
그 후로… 지금도 꿈틀이를 입에 대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