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나는 아직도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by 손샤인

1년쯤 지나니 병원 생활에 제법 익숙해졌을 무렵이었다.

어느 날, 나이트 근무를 앞두고 오른쪽 아랫배에 통증이 밀려오기 시작했다. 고열까지 겹치니 실신할 것 같았다. 당황했지만, ‘별일 아니겠지’라는 마음에 진통제를 털어 넣고 근무에 들어갔다. 환자들 생각에 몸 상태를 돌아볼 여유도 없었다.


하지만 자정을 넘기자 허리를 펼 수조차 없는 통증에 결국 동료에게 사정을 말하고 응급실로 향했다. 결과는 급성 맹장염. 그렇게 나는 응급 수술을 받고, 병원의 수술대에 오르게 됐다.


집에 연락도 못 한 채 수술을 마치고, 며칠 후 휴가를 받아 집으로 내려갔다.

엄마는 나를 보자마자 우셨다.

“밥을 너무 안 먹어서 맹장이 터졌구나… 불쌍해서 어쩌냐…”

미안하다며 우는 엄마가 이해되지 않았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짜증까지 냈다.


그래도 며칠 동안 엄마가 차려주는 밥상 앞에서 잠시 호강하며 지냈다. 그러는 중에도 엄마는 동네를 누비며 ‘우리나라에서 젤로 큰 서울아산병원 간호사 딸‘이 집에 왔다고 동네방네 자랑하고 다니셨다.

만약, 내가 의사였으면 현수막 달리는 건 시간문제?

조금은 창피했지만, 엄마어깨에 삼단뽕 들어가는 일이라 생각하고 말리지도 않고 창피해하지 않기로 했다.

덕분에 우리 아파트를 중심으로 300m 반경 안에서는 내가 아산병원 간호사라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였다.


시간이 흐른 후, 나도 아이를 낳고 키우며 내가 수술했을 때 엄마가 왜 그렇게 우셨는지 알게 됐다.

엄마는 나를 임신했을 때 입덧이 너무 심해서 거의 아무것도 못 드셨고, 나는 8개월 만에 작게 태어나 자주 생사의 고비를 넘겨야만 했다. 그래서 엄마는 내가 아프기만 하면 늘 당신 탓이라며 눈물을 흘리셨다.


나 역시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임신 기간 내내 입덧으로 고생했고, 아들을 8개월 만에 저체중으로 낳았다. 그 아들이 5살이 되던 해, 심장병과 갑상선 기능항진증 진단을 받았을 때—

나도 모르게 엄마처럼 “내 탓이야” 하며 자책했었다.

엄마들은 자식이 아프면 무조건 본능적으로 본인 탓을 하나보다.


며칠 뒤 몸이 회복되어 서울로 돌아간 나는 병동에 고마운 마음이 컸다. 나로 인해 고생했을 동료들에게 미안함을 안고 있던 참에, 동기 한 명이 주말 근무를 바꿔달라고 부탁했다.

그 친구도 지방 출신이었고, 엄마 생신 선물 사러 백화점에 가야 한다기에 흔쾌히 근무를 바꿔줬다.


그날 나는 친구 대신 이브닝 근무를 나갔고, 병동에서 차팅을 하던 중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떨리는듯한 엄마 목소리였다.

“너 병원에 있는 거 맞지?”

“서울에 있는 백화점이 무너졌단다. 혹시 너도 거기 간 줄 알고… 다행이네, 그럼 일해.”


그 순간 병실 안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선생님! 삼풍백화점이 무너졌대요!”


1995년 6월, 삼풍백화점 붕괴.

500명이 넘는 사망자와 천 명이 넘는 부상자.

그날, 내 동기를 잃었다.


근무를 바꿔준 친구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며칠 뒤, 붕괴된 건물 잔해 속에서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내가 그 근무를 바꿔주지 않았다면…

삼풍백화점 대신 병원 근처 롯데백화점에 갔더라면…


내 탓이라는 자책감에 나는 병원 생활을 계속하기 어려울 정도로 무너져 있었다.

그리고 생각했다.

간호사라는 직업, 아산병원이라는 이름, 예쁜 유니폼…

그 모든 겉모습이 좋아 시작했던 내가, 정말 중요한 걸 잊고 있었던 건 아니었을까.


너무 일찍 하늘나라로 간 동기 몫까지 두 배로 일하자 다짐했고, 그래서일까, 나는 아직도 병원을 떠나지 못하고 있다.

어쩌면… 나에겐 아직 끝내지 못할 마음 아픈 이유가 남아 있는 건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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