셔플, 갈비뼈, 그리고 언니들과의 책거리
4주 동안, 일주일에 두 번씩 줌 화면을 켰다. 그 앞에 앉은 나는 춤을 추지 못했다.
가슴에는 전쟁터에 나가는 장군처럼 갈비뼈 보호대를 갑옷처럼 두른 채. 셔플 동작을 눈으로만 익히고, 가슴 통증에 기침조차 할 수 없었고, 진통제는 내 하루 루틴의 일부가 됐다. 움직이려는 시도는 감히 하지 못했다.
나와는 달리언니들의 발놀림은 나날이 가벼워졌다.
줌 화면 속에서 언니들은 점점 자유로워졌고, 나는 점점 더 갇혀갔다. 속상함과 짜증이 쌓여갔다. 하지만, 나에겐 하나의 희망이 있었다.
“책거리 여행.”
군산에서 열릴 우리들의 첫 번째 오프라인 만남. 그 기대 하나로 나는 통증과 답답함을 견뎌냈다.
진통제를 꼬박꼬박 챙겨 먹으며 달력에 동그라미를 그려갔다. 여행 하루 전, 나는 언니들과 함께 군산에 먼저 도착했다. 이곳저곳을 다니며 사진도 찍고 가볍게 셔플도 추었다. 그리고… 춤보다 더 따뜻한 ‘자매애’라는 리듬을 맞춰가기 시작했다.
책거리 당일, 전국 각지에서 모인 중년의 남녀들. 처음 보는 얼굴들이지만 ‘셔플’이라는 공통점 하나로 우리는 금세 가까워졌다.
다연선생님. 그분은 내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작은 체구에서 어떻게 그런 힘이 나오는지 쉴 새 없이 움직이며 수업을 이끌었다. 진심과 열정이 튀는 사람.
에너자이저보다 강했고,‘내가 환갑이야!’를 몸으로 부정하는 듯한 파워풀한 댄서였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셔플은… 마라톤보다 어렵다. 적어도 내 몸엔 그랬다.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는 다리, 금세 지쳐버리는 체력,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좌절감. 갈비뼈가 금 간 건 사실이지만, 그걸 핑계 삼고 싶지 않았다.
내 몸이 마음을 못 따라가고 있다는 것 자체가 자존심이 상했다. 그런 내 마음을 언니들은 다 안다.
“괜찮아, 우리가 가르쳐줄게.”
그 짧은 말에 나의 부서진 자존심은 살짝 복구되었고, 셔플보다 더 따뜻한 위로를 받았다.
춤을 추지 못한 시간이었지만, 나는 춤보다 더 소중한 것들을 배웠다. 인내, 연대, 그리고 사랑. 내 곁에는 같은 박자에 발을 맞춰줄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난, 다시 추게 될 것이다. 금이 갔던 갈비뼈도, 조금 뒤처진 실력도 언젠간 나의 ‘리듬’으로 돌아올 것이다.
그렇게 우리의 셔플은, 다시 시작된다.
언제부터였을까. 음악이 들리면 발이 먼저 반응하기 시작한 것이. 어느 날 TV에서 젊은 친구들이 신나게 셔플댄스를 추는 모습을 보았다. 빠른 비트에 맞춰 가볍게 튕겨 오르는 발걸음, 경쾌한 몸짓. ‘우리도 저렇게 춰볼까?’ 장난스레 던진 말이 어느새 현실이 되었다.
우리는 50이 넘은 세 자매.
각자 다른 삶을 살아왔지만, 어릴 적부터 함께 뛰놀던 그때처럼 지금도 함께 새로운 도전을 한다. 젊은이들처럼 민첩하지 않지만, 우리는 우리만의 리듬으로 배워간다. 처음엔 왼발과 오른발이 엉키고, 박자를 놓치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서로를 보며 깔깔 웃었다.
“언니, 거기서 한 박자 쉬어야 해!”
“야, 난 쉬면 다시 못 움직여!”
우리의 셔플댄스는 완벽하지 않다. 하지만 매 순간이 즐겁다. 뻣뻣했던 몸이 조금씩 부드러워지고, 어색했던 동작이 자연스러워질 때마다 우리는 눈을 마주 보며 환하게 웃는다. 어쩌면 우리는 늘 춤추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삶이라는 무대 위에서 때로는 빠르게, 때로는 천천히, 쉼 없이 발을 내디디며 살아왔으니까. 셔플댄스는 우리에게 단순한 취미가 아니다. 그것은 세 자매가 함께하는 또 다른 인생의 리듬이다. 우리는 앞으로도 계속 춤출 것이다.
발이 움직이는 한, 마음이 들썩이는 한, 우리만의 템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