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전철을 잘 못 탄다.
‘못’이 아니라 ‘못한다’는 게 정확하다. 갈아타는 노선표를 천천히 뜯어봐야만 이해가 가고, 사람들로 붐비는 공간은 여전히 익숙하지 않다.
그러니 캐리어를 끌고 전철 안으로 들어서는 그날은, 작은 용기를 냈던 날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급하게 내리던 여자의 힐이 내 우측 네 번째 발가락 위로 정확히 찍히고 말았다. 내 삶도, 내 발가락도 거기서 멈췄다.
아무 말 없이 사라진 그녀, 그리고 엄청난 통증을 붙잡고 선 채, 나는 그냥, 전철에 올라탔다. 아무도 몰랐다. 내가 그날, 주저앉고 싶었다는 것을.
운 좋게 앉은자리에서 발을 내려다봤다. 퉁퉁 부어오른 발가락은 이미 말을 잃은 듯했다. 강남역에 도착해 오랜만에 만난 아들을 보자 통증은 신기하게도 가셨다.
아들 앞에서는 강한 엄마였으니까.
하지만, 남편을 만났을 땐 걸음을 옮기지 못할 만큼 아팠다.
강한 척은 더 이상 하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엄살쟁이도, 약한 사람도 아니었다. 그냥, 아픈 사람이었다.
다음 날, 병원에서 받은 진단은 족지골 골절. 나의 발가락은 이제 이름을 얻었다.‘족지골 골절’.
놀랍게도 피멍까지 올라와 있었다. 운동도, 나의 일상도 모두 정지됐다. 달리기, 테니스, 요가, 셔플… 모두 ‘잠시 멈춤’.
좌절, 짜증, 그리고 쓸쓸함이 동시에 몰려왔다.
그때 작은언니가 말했다.
“우리 셔플 다시 해보자. 줌으로 하는 곳이 있대.”
마음속으로는 아직 절뚝이는 나를 설득해야 했지만 나는 언니들과 함께 다시 걷기 시작했다. 쉘 위셔플 26기. 숫자마저 희망처럼 들렸다. 몸이 낫고, 추석 즈음 우린 고성 바다로 서핑 여행을 떠났다.
언니들과 함께라면 나는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바다에서 춤도 췄다. 릴스 하나 찍는 데, 내 몸치가 들통났지만 언니들은 깔깔대며 나를 더 사랑해 줬다.
그렇게 신이 난 우리는 파도 위로 올라탔다.
그러다 나는 파도에 밀려 가슴으로 모래사장에 내동댕이쳐졌다. 숨이 멎을 듯한 고통. 하지만 팔다리가 무사한 것에 안도했다.
그날 밤, 통증은 있었지만 진통제를 삼키고 언니들과 수다를 떨며 웃었다.
다음 날 아빠 엄마 산소에 가서 춤을 추기로 했기 때문이었다.
“이게 효도다.”
살아계실 때 못했던 걸 이제라도, 춤으로 전하고 싶었다.
팔을 들어보려는 순간, 찌릿—가슴이 아니라, 뼛속이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그날 우리는 아빠 산소 앞에서 춤을 췄다. 세 자매가, 웃으며, 흔들리며, 마지막엔 외쳤다.
“아빠, 엄마 사랑해요.”
며칠 뒤, 병원에 들러 찍은 엑스레이 앞에서 의사가 말했다.
“몸이 유리로 되셨나요?” 늑골 골절, 그것도 두 군데.
순간, 나는 아무것도 말할 수 없었다. 내가 진짜 유리로 만들어진 것만 같았다.
아니면, 이 나이에 순발력이 떨어졌다는 슬픈 현실을 마주한 것일까. 병원에 병가를 내고 나는 다시 멈췄다.
생각도, 몸도, 셔플도. 누구의 위로도 들리지 않았다.
그냥, 화가 났다. 대상 없는 분노.
나의 노후계획은 건강이다.
하나, 출발도 하기 전에 자빠져버린 내 노후 계획이 원망스러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은 여전히 ‘다시’라는 단어에 기대고 있다.
다시 셔플을 하고, 다시 건강을 찾고, 다시 춤을 추며 웃는 날을 기다리며. 아마도 그 모든 ‘다시’는 내가, 그리고 우리가 살아있다는 증거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