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조차 허락되지 않던 시절 …

by 손샤인

요즘 들어,

귓가에 자꾸 맴도는 이름 하나가 있다.

병원 복도 한쪽, 오래전 어느 봄날. 키 작고, 야위고, 허리가 굽은 한 할머니가 조용히 침상 곁에 앉아 있었다.

누렇게 빛바랜 앞치마 차림, 주름진 손엔 오래된 생의 흔적이 묻어 있었다. 그분의 웃음에는 세월이 만든 주름보다 더 깊은 이야기가 깃들어 있었다.

“할머니, 성함이 어떻게 되세요?”

내가 조심스레 물었다.

“나? 이 씨.”

“네? 이름이요~”

“응. 내가 성은 이 가고, 이름은 씨야.”

그 말을 하며 할머니는 쑥스러운 듯 웃으셨다.

그러다 잠시 고개를 숙이며 담담히 덧붙이셨다.

“우리 아버지가 내가 계집아이로 태어나서 화가 나셨대.

그래서 그냥 이 씨라고 지었어.”

순간, 숨이 막혔다.

그 한마디가 내 가슴에 깊이 박혔다.

태어난 이유가 화였고, 이름이 벌이었던 시절. 할머니의 이름이 세상과의 첫 상처였다는 사실이 가슴 깊숙이 내려앉았다. 그 시절의 여자들은 흰 개는 백구, 누런 개는 누렁이라 불리던 세상 속에서 자신의 이름조차 ‘이 씨’로 불리며 살아야 했다. 존재가 아닌, 서운함으로 불렸던 이름. 그럼에도 그들은 묵묵히 견뎠다.

부서지지 않고, 상처투성이인 손으로 자식들을 키우고, 밥상을 차리고, 하루하루를 사랑으로 이어갔다.

할머니의 이름 ‘이 씨’는 그 시대를 견딘 모든 여성의 이름이자 눈물과 인내로 짠 삶의 상징이었다.

나는 생각했다.

‘이름이 무엇이든, 그 이름을 품고 버텨낸 삶이

진짜 이름이구나.’

이름은 누가 지어준 한 단어가 아니라, 살아내며 만들어가는 또 다른 얼굴이었다. 그리고 할머니의 이름엔 억눌림보다 단단함이, 비애보다 품이 있었다.

그날 이후, 나는 이름을 들을 때마다 그 사람의 생을 함께 떠올리게 되었다. 그 이름이 짧든, 흔하든, 낯설든

그 안에는 반드시 견딘 날들이 있고, 사랑했던 시간들이 있다. 오늘 나는 그 이름을 조심스레 불러본다.


이 씨, 참 고운 이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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