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입동은 김장철의 시작이었다.
아침이면 거실 가득 배추 냄새가 퍼지고, 부엌에서는 커다란 대야에 배추가 층층이 쌓여 있었다.
엄마는 앞치마 끈을 질끈 동여매고, 옆집과 옆동네 아줌마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배추 속을 채우며 깔깔 웃는 소리, 서로의 손끝에서 묻어나는 정, 그리고 잠시 쉬는 틈마다 들리던 “이 양념은 참 잘됐다”는 칭찬이 지금도 귀에 선하다.
그 시절의 입동은 바람이 매서워도 마음은 늘 따뜻했다 찬바람 사이로 김칫속의 마늘 향과 고춧가루 냄새가 섞여들던 그 냄새, 그건 단순한 김장의 냄새가 아니라 가족의 생계를 함께 꾸려가던 사랑의 냄새였다.
지금의 입동은 너무 조용하다.
입동인지도 모른 채 하루를 보내고, 김장이라 해도 마트에서 사 온 절임배추 몇 포기면 금세 끝이 난다.
주방은 고요하고, 대야 대신 커피 잔이 놓여 있다.
뜨거운 김칫속 대신, 김이 피어오르는 커피를 손에 들고 창밖을 본다. 빗소리도, 바람소리도, 사람 소리도 없는 집 안은 편안하지만 어쩐지 낯설다.
몸은 편해졌지만 마음 어딘가가 비어 있다.
손으로 버무리던 정, 함께 어깨를 부딪치던 온기,
그 수다스러운 김장날의 소음이 지금은 너무 그립다.
시간이 흐르고 계절은 여전히 오지만, 사람들의 삶은 참 많이 달라졌다. 예전엔 겨울을 맞기 위해 모였고,
그 모임이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손이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도 함께 웃고, 김장김치 한 통 나눠 들고 서로의 집을 오가던 그 시절엔 마음이 더 단단하고 넉넉했다. 이제는 각자의 방 안에서 조용히 겨울을 맞고, 서로의 안부는 메시지 한 줄로 대신한다. 온기는 여전히 있지만, 그 온기를 전하는 방식이 달라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절은 언제나 제자리를 잃지 않는다. 해마다 입동이 찾아오면 나는 어김없이 그때의 엄마를 떠올린다. 손끝이 갈라져도 웃음을 잃지 않던 얼굴, 고춧가루 묻은 손으로 내 입에 김치를 넣어주며 “너도 한입 먹어봐라” 하던 그 따뜻한 목소리. 엄마는 늘 분주했지만, 그 안엔 사랑이 있었고 그 사랑은 세월이 지나도 내 안에서 여전히 익어가고 있다.
찬바람이 불어도 괜찮다.
그 바람이 불 때마다 나는 다시 그 시절의 냄새를 맡고,
엄마의 웃음소리를 떠올린다. 입동은 그렇게 나에게 ‘그리움의 계절’이 되었다. 한때는 당연했던 온기가 이제는 그리움이 되고, 그리움이 나를 다시 따뜻하게 만든다.
오늘은 입동.
세상은 차갑지만, 기억은 여전히 따뜻하다.
그리고 나는 오늘도 그때의 엄마를 생각하며 조용히 마음의 김치를 버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