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박과 토마토 사이에서….

[100-009]

by 손샤인

수박과 토마토 사이에서 — 아빠 엄마의 기억 속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가끔, 아주 사소한 순간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든다. 아빠와 엄마의 기억 속, 나는 어떤 딸이었을까. 그 질문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졌다가도 아릿해진다. 돌이켜보면 아빠 앞에서 나는 늘 수박 같은 딸이었다. 겉은 말 잘 듣고 얌전한 셋째였지만, 속으로는 나만의 멋을 꿈꾸고 번뜩이는 반항을 품고 살았다. 아빠가 방 안에서 책장을 넘길 때면 나도 책상 앞에 앉아 공부하는 척했고, 아빠가 한 마디쯤 칭찬해 주면 그 작은 순간을 오래도록 마음에 간직하곤 했다. 그러나 아빠의 시선이 사라지는 순간 나는 완전히 달라졌다. 똥꼬치마를 입고 거리를 걸었고, 엄마에게 몰래 산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을 보며 세상이 다 내 것이라도 된 듯 고개를 까딱였다. 아빠 몰래 반짝이던 그 세계가 내 청춘의 일부였다.


엄마 앞에서의 나는 토마토였다. 겉은 그럴싸하게 익어 보이지만, 속은 아직 한참 덜 익은, 설익은 자존심과 여린 마음이 뒤섞인 딸. 엄마는 그런 나를 누구보다 잘 아셨다. 나의 속사정을 이미 다 알고 있으면서도 간섭하지 않으셨다. 꾸미고 나가도, 다이어트한다고 투정 부려도, 엄마의 관심사는 언제나 하나였다. “니 밥은? 밥은 먹었냐?” 엄마는 사랑을 그 어떤 말보다 밥 한 그릇에 담아 건네셨다. 치매가 오고 기억이 흐려진 뒤에도, 하루에도 몇 번씩 전화를 걸어 똑같이 물으셨다. “은영아, 밥은 먹었어?” 그 말이 반복되는 동안 나는 엄마가 점점 멀어지는 게 아니라, 오히려 더 깊은 곳에서 나를 잊지 않으려 애쓰는 마음을 느꼈다.


아빠도 그랬다. 마흔이 넘은 딸이 밥 한 공기를 다 비웠다고, 아이를 대하듯 “우와~ 은영이 밥 다 먹었네! 기특하다!” 하고 손뼉을 치던 사람. 그 순간 나는 어른이라는 무게를 잠시 벗고, 부모의 사랑 속에서 자라는 아이로 돌아갔다. 부끄럽고 웃기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이 따뜻해지던 그 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든다.


이제 부모님 모두 하늘에 계시지만, 나는 여전히 그 사랑의 잔향 속에서 산다. 내가 수박 같고 토마토 같던 시절을 안전하게 통과할 수 있었던 건, 두 분의 사랑이 견고한 울타리처럼 나를 감싸주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요즘도 밥을 다 먹고 나면 혼자 속으로 작은 만세를 부른다. “엄마, 아빠. 나 오늘도 잘 먹었어요.” 그렇게 말하고 나면, 어쩐지 오늘 하루도 괜찮게 살아낸 것 같아진다. 부모님의 기억 속 딸로서, 여전히 나는 잘 자라고 있다.

#책강대학 #백일백장 26기 #책과 강연

작가의 이전글‘서울 자가 김 부장’이 우리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