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급 여교사의 탄생
학교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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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익고 약한 과일은 학교라는 공간에서 굴러 떨어지지 않기 위해 3년을 꾸역꾸역 버텨냈다.
고등학교를 무사히 졸업하고,
진로에 대해 잠깐 방황한 후 사범대로 진학하고, 나는 못다 한 나의 대업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잡았다.
학교 망해라.
아니, 학교 변해라.
그래서 다시 돌아왔다.
그 학교에, 내가 가고 싶어 했던 여고에,
기간제 교사 면접에 합격해서 말이다.
[Web발신]
2019년 선생님의 성과상여금 등급은 B등급입니다. 감사합니다.
나는 휴대폰 문자를 확인하곤 이내 침대 위로 던져버렸다. 학교에 2학기에 들어와서 고작 반년을 일했으니 남들처럼 좋은 성과를 받을 수 없단 건 알고 있었다. 담임도 아니고 중요 업무도 아니었으니까. 그렇지만, 수업도 학생 상담도 열과 성을 다했다. 그런데 B등급이라니?! 교원 성과급은 S, A, B의 세 등급으로 나눠져 있으니 결국 상, 중, 하 중에 하로 분류되었다는 말이다.
교사가 되어 돌아온 학교에서도 이렇게 굴러 떨어질 줄이야. 나는 여전히 설익고 약한 과일임을 또다시 이렇게 타의로 증명하고야 말았다. 침대 이불을 발로 걷어차며 씩씩거렸다. 내 방 책상 위에 어지럽게 흐트러진 수업자료들이 내 손길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쳐다보기도 싫었다. 밤새서 정성 들여 만든 학습지, 과정형평가 계획서 따위가 무슨 소용인가. 어차피 나는 B급 여교사다.
그런데 묘하게 속 시원하기도 했다.
나는 B급 여교사, 학교가 별 기대할 바 없는 잠시 있다 떠나는 기간제 교사, 무슨 등급을 받건 무슨 상관인가. 여하튼 학교는 여전히 마음에 안 들지만, 학교! 네가 뭔데 날 평가해! 싶지만, 이렇게 된 거 될 대로 돼라 내가 하고픈대로 한다 싶었다.
개학해서 출근하면, 정말 내가 하고픈 대로 할 테다. 물론 실제로는 또 출근해서 열심히 일할게 분명했지만, 속상한 마음에 밤새 씩씩거리다가 새롭게 각오를 다졌다.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고 나선 출근길, 뜻밖의 소식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올해 주된 업무는 우리 학교 홍보입니다."
예?! 제가요?! 왜요?!
나는 업무분장에 관한 설명을 듣고 손에 들고 있던 머그컵을 놓칠 뻔했다. 가까스로 손 끝에 힘을 줬으니 망정이지 하마터면 교무실의 내 책상을 커피바다로 만들 뻔했다.
"중학교 방문 홍보, 학교 입학 설명회, 학교홍보 리플릿 및 홍보 물품 제작, 학교 SNS 관리 등을 맡게 될 겁니다.."
업무 부장님은 담담히 말을 이어나갔고 나는 어리둥절해하며 인수인계자료를 넘겨받았다.
"학교를 대표하는 업무니까 신경 써주세요."
나는 듣고 있는 내 귀를 의심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느덧 내 손에는 학교의 전년도 홍보리플릿과 학교의 정보가 담긴 USB가 들려있었다. 나는 노트북을 켜고 USB의 파일을 다운로드하며 생각에 잠겼다.
이걸 내가 해도 되나?
수많은 모범교사들 가운데
B급 여교사인 내가, '학교 망해라'라고 고사를 지내고 학교 탈퇴를 희망하며 마음속에 자퇴 희망원을 늘 갖고 다니던 내가, 지금은 학교를 조금 더 살만한 곳으로 변화시키고픈 소박한 목표를 가진 내가 '우리 학교에 오세요'를 맡는 게 믿기지 않았다. 안티 스쿨 티처의 스쿨 마케팅이라니.. 이 무슨 미스캐스팅인가?!
인생은 모순의 연속이고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지만 이것은 너무나 반전이었다. 누가 내 과거를 알고 있나. 그래서 일부러 이런 과제를 나한테 던져준 건가. 말도 안 되는 의심까지 들었다.
마우스를 몇 번 틱틱 거리며 컴퓨터 파일을 열었다 닫았다 했지만 마음이 잡히질 않았다. 어떻게 해야 오고 싶은 학교를 만들 수 있을까. 나는 생전 내 인생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난생처음 하는 고민을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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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학교에 오고 싶어서 온 사람 있니? "
새 학기의 시작에 나는 고1 담임을 맡게 되었다. 그날도 아침 조례에 들어서자마자 입을 열곤 이제 막, 중학교에서 올라온- 앳된 우리 반 소녀들의 얼굴을 조용히 훑었다.
아직은 학기 초라 그런지 담임과도 학교와도 어색해서일까 선뜻 아무도 대답이 없었다. 당연하다, 20년 전의 나라도 대답 없이 책상에 고개를 묻었을 거니까. 나는 낮게 한숨지으며 '그러니까 지망해서 온사람 말이야, 손이라도 들어줘'라고 덧붙였다. 몇몇이 손을 들었다.
"누가 고등학교를 오고 싶어서 와요.."
교실 구석 어딘가에서 볼멘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게, 나도 그랬다. 누가 고등학교를 오고 싶어서 오는가, 가야 하니까 가는 거지. 나도 열일곱에는 오고 싶어서 온 학교가 아니었다. 누구보다도 그 마음을 격하게 공감할 수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은, 학교를 변화시키고 싶다는 목표로 제 발로 온 거지만, 과거엔 나 역시 그러했다. 정말이지 (구) 자퇴 희망자가 어른이 되어서는 학교를 오고 싶어 하는 학생들을 찾는다니, 코미디가 따로 없었다.
" 저는 우리 학교에 오고 싶어서 왔어요!"
그때 한 소녀가, 적막을 깨고 짧게 외쳤다. 정말?! 나는 고개를 들어 그쪽을 바라봤다. 우리 반 서기가 날 향해 조용히 웃고 있었다. 평소에도 초롱 초롱하다고 생각했던 그녀의 두 눈이 맑게 빛나고 있었다.
"왜 우리 학교에 오고 싶었는데?"
내가 그녀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묻자, 그녀가 까르르 웃으며 대답했다.
"급식이 맛있다고 해서요!!!!!!!!!!!"
여기저기에서 공감의 웃음소리가 이어졌다. 아, 그렇다.. 여고생은 그런 존재다. 내가 너무나 거창한 기대를 걸었네.. 내가 허탈한 웃음을 짓자 여기저기에서 교복이 예뻐요, 집도 가까워요 같은 말들이 이어져 나왔다. 그래.. 고맙다 얘들아. 나는 민망한 웃음을 지으며 아침 조례를 서둘러 마쳤다.
"선생님! 있잖아요.."
교실을 뒤돌아 나오는데, 아까 그 우리 반 서기가 나를 불러 세웠다.
"저는 우리 학교가 제일 기대돼서 왔어요!"
뭔가 여기 오면 잘 될 것 같고 그랬어요!라고 이어 말하는 그녀를 보며, 순간 '기다려지는 내일이 곧 미래'라고 한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렇구나, 나는 답을 조금 찾은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