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교시, 이비에스의 상인
가장 설익고 약한 과일이 가장 먼저 떨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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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교시, 잠이 덜 깬 이른 아침의 나는 EBS 방송이 흘러나오는 칠판 옆 TV를 뒤로 한 채 오늘도 가까스로 지각을 면한 상황에 안도하며 책상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상황은 다들 비슷했다. 군데군데 빈자리가 보였고, 앉아있는 주위의 학생들도 다들 반쯤 졸고 있었다.
어차피 0교시에는 선생님이 거의 들어오지 않는다. 정식 수업 대신 방송만 나올 뿐이었고 간혹 순회하시는 선생님은 복도 감독을 하다 한 번씩 교실을 들여다보기만 했다.
나는 가방에서 꺼내려던 교재를 다시 집어넣었다. 대신 책상에 셰익스피어의 ‘베니스의 상인’을 펼쳤다. 귀로는 EBS 방송을 듣고, 눈으로는 ‘베니스의 상인’을 보고 있자니 지금 내가 읽고 있는 책이 ‘베니스의 상인’인지 ‘이비에스의 상인’인지 헷갈렸다.
그래도 좋았다. 나는 오늘부터 소속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많은 변화를 의미했다. 나는 자연스럽게 교실의 일원이 되었다. 그전에 내가 투명인간이었다면, 이제는 최소한 그냥 인간 1이 된 것이다.
그 평범함은 내게 너무나 소중했다.
나는 더 이상 무언가를 하면서 다른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아도 되었다. 온전한 '나'로 당당하게 있다는 것을 드러내기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됐다. 조금은 편안한 마음으로 책을 읽어나가던 가운데 한 문장이 눈에 띄었다.
《가장 설익고 약한 과일이 가장 먼저 떨어진다》
그런가?
나도 설익고 약해서 이 교실에서 먼저 떨어져 나간 것이었을까.
그렇다면, 마지막까지 매달려 있는 건 어떤 과일일까. 계속 매달려 있으면 잘 익어갈 수 있는 걸까, 잘 익어가다가 매달린 체로 썩어버리면 어떡하지.
설익고 약한 과일은 이 세상에 별 필요가 없는 것일까. 나처럼 설익고 약한 인간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걸까. 떨어져 나가지 않기 위해 발악했어야 했나. 그랬다면 떨어져 나가지 않았을까.
폭풍 같은 질문들이 머릿속을 휘몰아쳤다.
무엇하나 제대로 된 정답을 내릴 수 없었다.
"이번 주제는 미래야. 각자 미래에 대해 시를 써와서 다음 주에는 시토론을 하도록 하자. 다음 주 이 시간까지 다들 준비해 와."
그날 오후 동아리실에서 모인 시문학부의 첫 번째 주제는 '미래'였다. 나는 동아리실을 제일 마지막으로 나오며 아침에 했던 '설익은 과일'에 관한 생각을 떨쳐내고 이번 주 동아리 활동의 주제를 생각하려 애썼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둘은 별개의 이야기 같지 않았다. 내게는 설익고 약해서 바닥으로 가장 먼저 떨어진 그 과일이 곧 일어날 또 다른 내 미래 같았다.
"무슨 걱정을 그렇게 해?"
나 혼자 마지막에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동아리실 열쇠를 찾아 문을 잠그는데 낯선 목소리가 내 귓가를 스쳤다. 오늘 처음 본 같은 동아리 남학생이었다.
"아까부터 엄청 심각한 얼굴이던데 시 별로 안 좋아해? 억지로 동아리에 가입한 거야?"
전혀 다른 맥락을 짚은 그에게 나는 대답 대신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웬만한 글은 다 좋아했다. 특히 문학작품은 더욱. 그러나 낯선 이에게 내 상황과 생각을 차마 길게 설명하지 못해서 나는 대충 짧게 둘러댔다.
"미래라니까 뭔가 거창한 것 같아서..."
내가 생각해도 어설픈 변명이었다. 그렇지만 그는 제법 진지한 얼굴로 내 표정을 빤히 들여다봤다.
"미래가 별 건가, 기다려지는 내일이 미래지 뭐."
기다려지는 내일이 미래다. 나는 그의 말을 낮게 따라 읊조렸다. 하루하루를 버티기 급급했던 내게 기다려지는 내일이란 낯선 단어였다.
"네 이야기를 써. 너의 기다려지는 내일에 대해 말이야."
그는 짧은 조언을 건네곤 곧 학원 버스가 올 시간 이라며 금방 내 눈앞에서 사라졌다. 나는 다급하게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생각에 잠겼다.
나의 기다려지는 내일은 어떤 모습일까.
내일, 모래, 그 후의 어른이 된 나는 어떤 모습일까.
그때의 나는 몰랐다.
나의 기다려지는 내일, 그 미래의 내가 있을 공간이 여전히 학교란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