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으러 가겠다.
-6-
"학교 망해라"라고 외치던 나는 살기 위해
내가 있는 이 공간을 바꾸기로 했다.
그렇다면,
변해야 할 학교는 어떤 공간인가.
학교는 '학생들'을 위한 공간이다.
그러나 학교에서 실상 '학생 개인'에게 주어진 공간이란, 책상 하나와 사물함 하나가 다였다. 나는 교실 안에서 반 평 남짓한 책상 하나를 받았다. 위치는 종종 바뀌었지만 그 절대적인 크기는 거의 무변했다.
그렇지만 나는 그 좁은 책상이 내 세상의 주 무대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는 하루 중 대부분을 이 공간에 옴짝달싹 못하고 메여있었지만 내 생각은 저 창문과 교문 너머로 무한히 확장하고 있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학교 안의 내 공간,
내 책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것이 원래 무엇이었건 간에, 이제는 내가 세상을 향해 뻗어가는 통로가 되어야 했다.
그것만이 내가 살 길이었다.
나는 교실에서 무너지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쓰고 또 썼다. 수업 필기를 옮겨 썼고 내 생각을 연습장에 적어 내렸다. 때로는 내 감정을, 불안을 맹렬히 쏟아냈다. 쓸 거리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읽었다. 교과서의 문학 작품들, 신문이나 일간지의 기사와 사설들. 읽고 마음에 드는 구절은 옮겨 썼고, 간혹 좋은 감명을 받으면 거기에 착안해서 내 생각을 써 내려갔다.
그즈음의 나는 부쩍 말 수도 줄어들었고,
예민해졌지만 이상하게도 전처럼 마음속에 폭풍이 치진 않았다. 오히려 커다란 납덩어리가 속에 가라앉은 것처럼 담담하고 고요했다. 마음 한편에서 울고 있는 아이는 여전했지만, 그것도 면역이 되어가고 있었다.
인간은 적응의 동물이라서일까. 나는 날 향한 이 비우호적 무관심도 그리 나쁘지 않은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누가 날 어떻게 볼까'라는 고민만 없으면 실상 그리 나쁘지 않았다. 뭐 나쁘게 보면 어쩌겠는가. 나쁘게 보인다고 해서 내가 나쁜 사람인 것은 아니다. 그냥 나답게 살자고 생각했다. 그래서 뭔가를 읽고 쓰고 또 읽고 썼다.
물론 그 사이에도 불행은 소나기처럼 일순 툭 하고 나를 쏟아져 내리며 지나치곤 했다.
어떤 날은 화장실에 가느라 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가 정성 들여 쓴 글 위로 욕지거리가 적혀있기도 했다.
그들은 내게서 유일한 탈출구인 글마저도 빼앗으려 한 것이다. 나는 멍하니 낙서가 적힌 노트를 바라보다 화이트로 그 부분만 다시 죽죽 그었다. 빼앗긴 글에도 봄은 오는가. 잘 모르겠지만 나는 이를 악물었다. 오지 않는다면, 내가 찾아가면 그만이다.
불행이 어느 날 갑자기 쏟아져 내렸듯
행운도 어느 날 갑자기 찾아왔다.
'저 아이(나)에게는 말을 걸지 않는다'는 불문율을 깨고 한 학생이 내게 다가온 것이다.
"저.. 혹시 글 쓰는 거 좋아해?"
처음엔 잘 못 들은 줄 알았다.
나는 대답대신 눈을 동그랗게 뜨고 손가락으로 나 자신을 가리켰다.
교실에서 말을 안 한 지 오래되어서 입을 떼는 게 어색했다. 말이 잘 내뱉어지지 않는 나는 연신 고개를 갸우뚱했다.
맞은편의 그 아이는 멋쩍은 듯 웃으며 손에 쥐고 있던 홍보 책자 하나를 내게 건넸다.
"우리 동아리가 시문학 동아리인데.. 인원이 부족해서.. 글 쓰는 거 좋아하는 것 같던데 생각 있으면 부담 없이 같이 해볼래..?"
막 그렇게 어려운 건 아니야, 부담 갖진 말고.. 하며 어색하게 웃는 상대의 모습이 묘하게 낯설었다.
나는 입학한 지 두 달이 지나도록 거의 초면에 가까운 그 학생의 얼굴을 한 번, 그리고 내 앞에 들이밀어진 동아리 홍보 책자를 한 번 번갈아 바라봤다.
"고민해 보고 생각 있으면 마치고 우리 동아리실에 한번 들려줘."
그 학생의 말이 마치자마자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종이 울렸다. 모든 것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갔다. 달라진 건, 내 책상에 동아리 홍보 책자가 하나 올려져 있단 것뿐이었다.
《 시문학 동아리 OO 》
나는 그 동아리 홍보 책자를 찬찬히 읽어보았다. 시문학 동아리, 시는 교과서에서나 읽던 건데 그걸 직접 쓰는 동아리라고..? 그런데 이걸 왜 나한테 준 걸까. 무슨 의미로 해석해야 하는 걸까. 복잡한 마음과 호기심이 한데 엉겨 머릿속을 어지럽혔다.
재깍재깍.
그날따라 수업시간이 유독 느리게 흐르는 것 같았다. 나는 계속 고민했다. 궁금은 했지만, 가도 되는 건지 막상 두려웠다. 그렇게 7교시 정규 수업을 모두 마치고 보충수업이 시작하기 전의 그 잠깐의 시간,
나는 백만 년 만에 생긴 호기심을 안고 생전 가본 적 없었던 시문학 동아리실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