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로운 소녀

노력하는 자가 성공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해

by 손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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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님, 성적 상담 요청해도 되나요..?"


우리 반에서 가장 열심히 공부하는 그녀, 누구보다도 열심히 사는 그녀가 내게 상담을 요청했다. 당연히 되지. 되고 말고. 나는 노트북에서 한창 열심히 결재 중이던 공문을 끄고 그녀를 바라봤다. 원래도 유난히 발그레한 두 뺨이 더욱 상기되어 있었다.


"선생님 저 정말 열심히 했거든요.."


그녀는 억울하다는 듯 목이 멘 목소리로 말하다 고개를 떨궜다. 나는 평소에 그녀를 주의 깊게 보고 있었다. 어려운 가정형편에도 늘 꿋꿋하고 의젓했으며 과묵한 편이지만 누구보다 제 역할을 담담히 해내는 그녀였다. 특히 학교에 오는 주 5일 내내 오후자습과 야간자율학습에 모두 열심히 참여하고, 시험을 앞둔 두 주 전에는 고3학생도 아닌데 자원하여 토요자습까지 나와서 공부하곤 했다.


그녀는 누구보다 모범생의 원형 같았고, 자신의 공부만 챙기는 것이 아니라 주위 친구들에게도 의지가 되는 그런 존재였다. 내가 우리 반 1인 1 역할에서 면학도우미 역할까지 부여했을 정도이니 그녀의 열심히 한 노력에 대해서는 누구도 입을 댈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녀가 성적상담을 요청 한 이유를 나는 너무나 잘 알고 있었다.


"선생님 제 성적 아세요..?"


나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땅끝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곤 긴장된다는 듯 손끝으로 자신의 무릎을 톡톡 두드렸다. 학생들은 저마다 버릇이 있다. 이건 그녀의 버릇이었다. 무언가 참을 때 하는.


"왜 제가 8등급인 걸까요.."


잔뜩 움츠린 어깨가 안쓰러웠다. 녀는 주요 과목에서 믿을 수 없는 성적을 받았다. 내신이 9등급으로 산출되니, 8등급이라면 열심히 한 그녀에게는 너무나 아득한 숫자였다.


"선생님 과목도 성적이 잘 안 나와서 죄송해요. 열심히 가르쳐주셨는데.."


그런 것까진 신경 쓰지 않아도 돼. 는 괜찮다고 조용히 미소 지었다. 다행히 그녀는 울지 않았다. 다만 담담했다. 어쩌면 나보다도 더 어른 같았다.


"제가 해도 안 되는 인간일까 봐 무서워요. 아무리 공부해도 가망이 없을까 봐 무서워요.."


학교에 있다 보면 종종 어차피 안된다고 생각하는 학습된 무력감을 가진 학생들을 종종 만난다. 그들 중 몇몇은 최선을 다하는 것에 두려움을 갖고 있었고, 몇몇은 정말 나름의 최선을 다하고 좌절하고 있었다. 나는 그럴 때마다 생각했다. 초에 등급은 왜 있는 걸까, 그리고 종이 위의 몇 글자로 인간을 평가한다는 게 과연 바람직한가. 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너 8등급 아냐, 너는 등급으로 매길 수 없는 인간이야."

"현실은 그렇지 않아요. 제 실력은 그냥 8등급인 것 같아요. 공부랑은 안 맞는 것일지도 모르고요.. 공부하는 건 그래도 즐거웠는데... 모르겠어요."


나의 낭만적인 대답과 그녀의 현실적인 대답이 교무실을 교차했다. 어쩌면 그녀의 말이 맞을지도 모른다. 현실이 그렇고, 이 현실과 냉혹한 경쟁체제의 룰과 시스템에 유독 투른 자들이 있고, 그녀 역시 그에 해당할지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모두가 이 냉혹한 체제에 맞게 냉혹하게 길들여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저마다 온도가 다르고 속도가 다르다. 어떤 한 부분에 서투르면 어떤가, 더 잘하는 걸 찾을 수도 있고, 연습하면 더 늘 수도 있다. 나는 의지를 잃어가는 그녀를 보며 대답했다.


"나는 노력하는 자가 잘 되는 게 정의라고 생각해."


갑자기 정의라니? 뜬금없는 소리에 그녀가 나를 의아하다는 듯 쳐다봤다. 나는 말을 이었다.


"나는 아직 정의로운 세상이라고 생각해. 네가 노력을 계속 이어한다면, 분명히 더 나아질 거고 너의 노력에 부응하는 어떤 변화가 생길 거라 믿어. 그리고 너답게 했으면 좋겠어. 꾸준하게, 우직하게 말이야. 너를 믿고."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란 고작 그런 것이었다. 학생들과 얘기할 때마다 느끼는 거지만, 그 무엇도 대신해 줄 수 없다. 다만, 몇 가지 선택지나 조언을 해 줄 뿐. 나의 말을 알아들은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이고 곧 자리로 돌아갔다. 그리고 그날도 열 시 반까지 심야자습을 다 마치고 집으로 향했다.






《○○ 장학금 학생 추천 바랍니다. 요건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가운데 성적이 우수하며 학업의지가 높은 학생입니다.》


얼마 후 교내 메신저에 장학 담당 선생님의 메시지가 왔다. 나는 누구보다 빠르게 응답했다. 저희 반에 해당하는 학생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상담한 그녀였다. 장학 담당 선생님은 바로 내게 전화를 걸었다. 나는 숨쉴틈 없이 내뱉으며 그 학생의 장점을 늘어놓았다. 조용히 듣고 있던 선생님은 이내 내게 되물었다.


"그 학생 1학기 내신 성적이 어떻게 되나요?.."


나는 대답할 수가 없었다. 아.. 이토록 장점이 많은 학생인데, 결국 숫자로 이야기하자니 선뜻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학업 의지와 발전가능성에 대해 열변을 토하고 말끝을 흐렸다.


"8등급 정도 됩니다.."


장학 담당 선생님은 잠시동안 대답이 없으셨다. 나는 마른침을 삼키고 대답을 기다렸다.


"선생님이 그렇게 까지 추천하시는 데에는 이유가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일단, 관련 서류들이랑 추천서 받아가서 작성해 주세요. 다른 학생도 추천 들어올지도 모르니까 일단 기다려주시고요.."


그래도 서류라도 받아서 추천서를 작성할 수 있는 게 어디인가. 나는 연신 감사의 인사를 드리고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신나게 서류를 작성했다. 추가로 학생의 가정형편을 증명할 수 있는 서류가 필요해서 학생의 어머니에게도 전화를 드렸다. 아직 학생에게는 이야기하지 말아 달라는 당부와 함께, 될 수도 안될 수도 있지만, 그래도 희망을 갖고 시도해 보는 것이라 말씀드리자 어머님은 흔쾌히 서류를 제공해 주셨다. 그렇게 서류와 추천서를 작성해서 장학 담당 선생님께 전해드리곤, 한동안 나도 잊어버렸다. 몇 주 후였다.



《선생님, 그 학생 장학생으로 선정되었습니다.



장학 담당 선생님의 메시지를 보고 나는 두 눈을 깜빡였다. 진짜인가? 신청하면서도 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렇지만 정말 장학생으로 선정되다니!! 나는 속으로 짧게 환호를 질렀다. 이내 학생의 어머님께도 전화를 드렸다. 어머님은 처음에 믿지 않으셨다. 그러나 제가 정말 장학생으로 선정되었다고 말하자 어렵게 내게 되물으셨다.


"성적이 낮은데.. 정말 장학생이 된 건가요?"


네, 학업의지가 투철하고 발전가능성이 높은 학생이니까요. 내가 이어 대답하자 어머님이 연신 감사의 인사를 했다. 나는 오히려 학생이 학업을 열심히 이어갈 수 있도록 집에서 보살펴주신 어머님께 감사하다고 말하고 전화를 끊었다. 몇 시간 뒤, 어머님께 연락을 받은 학생이 다시 교무실을 찾아왔다.


"선생님, 저 정말 장학생 되는 건가요...?"


스스로도 못 믿는 눈치였다. 나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어떤 일에도 담담했던 그녀가 울먹이며 말을 이었다.


"선생님 저 정말 기뻐요.. 감사합니다.. 더 열심히 할게요.."


나는 서랍에 있던 과자를 하나 꺼내 쥐어주곤, 당 떨어지지 않게 관리 잘하란 말을 덧붙이고 돌려보냈다. 기분이 좋아졌다. 내 위치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을 한 것이다.






그녀는 고등학교 2학년, 3학년에 올라가서도 꾸준히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았다. 그래서 자신이 원하던 지방거점국립대학교의 목표로 하던 학과에 입학하여 우리 학교의 신화가 되었다. 내신 8등급의 신화, 그러나 나는 그것이 내신 8등급의 신화가 아니라 지속된 믿음과 노력의 결과란 것을 안다. 몇 년 뒤 스승의 날을 맞아 나를 다시 찾아온 그녀가 말했다.


믿어줘서 고마웠다고.


내가 대답했다.


내가 바라던 미래를 이뤄줘서 고맙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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