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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도 끝으로 그림자가 하나 비친다. 그 그림자는 너라면, 너이길, 너였으면 그러나 네가 아니라 옆반 학생이었다.
나는 오늘도 등교시간을 십 분 훌쩍 넘게 등교하지 않는 그녀를 기다리며 속으로 화를 삭이고 있었다. 부재중 전화 5통째. 학부모님도 학생도 전화를 받지 않는다. 정말 미동조차 없었다. 그렇다. 그녀는 찐 이었다. 정말 찐 VIP였다. 아마 VIP에도 계급을 나눌 수 있다면 어린 날의 나와 같이 플래티넘 VIP였을 것이다. 툭하면 지각에 조퇴증과 외출증을 한도 무제한 카드처럼 휘두르는!!!!!
나는 솟구치는 분노를 다스리며 시계를 노려봤다. 시간은 흘러 흘러 어느덧 일교시가 시작되기 3분 전이었다. 그때 저 멀리서 그녀가 보였다.
아아-. 이육사의 시 '청포도'에서 내가 바라는 손님은 청포를 입고 온다고 했던가. 그래서일까 그녀 역시 교복 상의 대신 청색 후드티를 입고 용맹 무쌍하게 그러나 누구보다도 느릿느릿하게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한 달음에 달려가 그의 앞에 섰다. 그러나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녀의 1도 미안함이 없는 기색에서 마치 나는, 별안간 생사람 잡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 마냥 멀뚱해졌다.
"핸드폰을 집에 두고 왔어요.."
아, 그래? 어쩌라고. 핸드폰을 두고 온 것이지 신발을 두고 온 것은 아니지 않은가. 왜 지각하는 것인가. 자주, 유독, 너만, 혼자!! 나는 따져 묻고 싶은 마음을 꾹꾹 눌렀다.
그녀는 마음이 아픈 자였다. 물론 나도 마음이 아픈 자이고, 아픈 자였으니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나 기본은 해야 하지 않은가. '이해한다'vs'너무 한다'의 상충된 마음이 내 머릿속을 거세게 내리치고 있었다. 어쨌건 아픈 사람에게 화를 낼 순 없다. 나는 미동도 없이 그녀를 응시했다. 그녀의 인중을 정확히 7초쯤 응시했고 곧 그녀가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오, 정답. 그 말을 했어야지. 나는 지금은 입을 열면 일장 연설을 하거나, 본의 아닌 날카로운 말을 할 것 같은 마음에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곤 교실로 들여보냈다. 이내 1교시 시작종이 쳤다. 나 역시 수업에 가야 했다. 그렇게 나는 종례 시간에나 다시 만날 줄 알았다. 그녀가 점심시간에 나를 찾아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선생님 저 배가 아파서 학교에 못 있겠어요.."
네.. 저도 상시 배가 아프고 머리가 아프고 속이 울렁거립니다만.이라고 대답하고 싶은걸 참고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를 올려다봤다. 그녀는 그녀의 두툼한 손가락을 배 위에 얹고 연신 쓸어내리고 있었다. 나는 친절한 말투로 물었다.
"점심은 먹었나요?"
"네 점심 먹었는데, 많이 먹어서 체한 것 같기도 해요."
그럼 적당히 먹지 그랬니,라는 말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순간 들었으나 나는 그 말을 힘겹게 삼키고 보건실 입실증을 꺼냈다. 그러자 그녀가 나의 행동을 말로 저지했다.
"조퇴시켜 주세요."
음..
"약 먹어도 안 나아요. 병원 갔다가 집에 가서 쉬고 싶어요."
아.. 진심은 뒤에 있다. 집에 가서 쉬고 싶다는 거구나. 왜 쉬고 싶은지 나는 너무나도 잘 알았다. 오늘은 5, 6교시에 내리 과정형 평가(수행평가)가 있는 날이다. 나는 다시 되물었다.
"배가 아픈 거예요? 마음이 아픈 거예요?"
그녀는 지체 없이 대답했다.
"배요."
정말?!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나는 쓴웃음을 삼키며 그녀에게 한 발자국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녀가 뒤로 약간 주춤했다. 나는 또다시 대답 없이 그녀의 인중만을 지긋이 응시했다. 이번엔 아까의 7초보다 훨씬 많은 시간이 지났다.
"마음은 원래 아파요.. 저.."
또다시 느릿하게 대답하는 그녀를 보고 있자니 왠지 안쓰럽고 짠한 마음도 들었다. 이번에는 '안쓰럽다'와'그래도 쉽게 보내 줄 순 없다'의 갈등이었다. 왠지 오늘은 호락호락하게 조퇴증을 써주고 싶지 않았다. 아침의 그 등장이 괘씸해서인지, 어째서인지 이유는 나조차 잘 모르겠지만.
"있잖아요, 선생님 5,6교시 수업 없다?"
"예?"
무슨 뜻이게요..?^^ 내가 싱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이자 그녀는 불안하다는 듯 눈알을 굴렸다.
"의사 선생님이랑 진료받기 전에 나랑도 상담 좀 하면 어떨까요..?"
제가 더 꼼꼼하게 봐줄 자신 있는데..^^ 내가 연이어 말을 쏘아붙이자, 그녀의 얼굴이 점점 하얗게 질려갔다. 나는 느릿느릿하게 서랍 속 조퇴증을 꺼내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다른 한 손으로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의 아버님의 번호를 누르며 신호가 울리길 기다렸다.
그녀의 어머님은 몇 년 전에 돌아가셨다. 그녀의 유일한 보호자인 아버지께 전화해 본다. 신호가 끝까지 울리지만 받질 않으신다. 두어 번 신호를 더 울려보지만 역시나 부재중이다. 나는 씁쓸한 마음이 들었다. 생업에 바빠서, 또는 모종의 사유로 전화를 받지 못하는 것이겠지만 그 사실이 또다시 나를 서글프게 했다.
학생들을 들여다보면 제각기 천차만별인데, 어떤 이는 아침에 엄마가 깨워주면, 눈을 떠서 가족의 따뜻한 보살핌 속에서 아침을 시작한다. 엄마가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애달파하면 그걸 입만 벌려서 새끼제비처럼 받아먹고는 아빠가 태워주는 차를 타고 등교한다.
하지만 어떤 이는 스스로 알람을 맞춰서 일어나고 빈속에 터덜터덜 혼자 알아서 등교한다. 나는 그 간극을 안다. 그 간극이 어떤 차이를 빚어내는지 안다. 그건 숫자로 나타날 때도 있고 때론 웃는 얼굴의 쓴 입가에서나 뒷모습의 그림자에서도 나타난다. 내가 그랬기 때문에 나는 훨씬 더 잘 느낄 수 있다.
"병원 가서 진료확인서 꼭 받아오세요. 그리고 내일도 지각하면, 방과 후에 저랑 두 시간 집중상담하시는 겁니다. 아픈 마음을 선생님이 치료해 줄게요!^^"
"네.. 내일은 시간 괜찮아요."
그 뜻이 아니지 않은가. 나는 너털웃음을 지으며 아버님께 사정을 알리는 문자를 남기고 학생에게는 조퇴증을 건넸다.
내일은 지각유무에 상관없이 VIP코스로 그녀를 모셔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정말이지 묻고 싶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것을 아는가?
그대 속을 안아주길 바라는 이여.
나는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그녀의 뱃속이건 마음속이건 아픈 부분이 모두 얼른 낫길 응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