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들리며 피는 꽃
피 흘리며 피울 필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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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년을 올려 보내면 간혹 AS(애프터서비스)를 한다. 나에게는 보석 같은 그녀가 때론 너무 빛나서 어떤 이를 눈부시게 하기도 하고, 고요한 화석 같은 그녀가 돌연 잠수를 타고 굳게 입을 다물어 버리거나,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은 그녀가 자신이 가진 날카로운 면으로 의도치 않게 어딘가를 베이게 할 때도 있기 때문이다. 그럴 때면 나는 상담접수를 받고 때론 교사와 때론 학생과 추후 면담을 하곤 한다.
지금이 딱 그런 때이다.
"선생님 그녀가 학교에 안 와요.."
학교에 안 온다고요?! 나는 여교사 휴게실에서 만난 그녀의 다음 해 담임선생님에게서 뜻밖의 소식을 들었다. 나는 그 걱정 어린 소식에 잠시 할 말을 잃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그녀라니..
그녀는 내가 두 해를 연속으로 담임한 몇 안 되는 제자 중 하나다. 또한 내가 담당하는 동아리의 부원이기도 했다. 그녀는 매사에 의욕적이고 밝고 명랑하여 교우 관계도 좋았고 모두에게 긍정의 기운을 나눠주는 인간 비타민 같은 존재였다. 성적도 특출 나게 뛰어나진 않아도 특별히 처지지도 않는- 그러니까 모두가 꿈꾸는 평범하게 학교생활을 잘하는 모범생 그 자체였다. 그런 그녀가 고등학교 3학년에 올라가서는 학교를 잘 오지 않는다니..?
"이틀에 한 번 오고, 한 번 안 오고, 조퇴하고, 병원 갔다 늦게 오고.. 그런 상황이에요."
낮게 한숨 쉬는 맞은편 선생님의 얼굴에서 걱정과 슬픔이 묻어났다. 나는 그의 말을 조용히 경청했다.
"선생님, 나중에 그 친구 학교에 오면 선생님께 잠시 보내드려도 될까요? 저랑은 안지 몇 달 안 돼서 속 얘기를 하기 어려워하는 것 같아요.."
나는 조심스럽게 부탁하는 동료교사에게 당연히 괜찮다고 말하곤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였다. 아침 종례를 하고 교무실로 돌아오는데 그녀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책가방을 메고.
"어? 이제 왔어? 지각한 거야?"
내가 의아하다는 듯 묻자 그녀는 겸연쩍게 웃으며 손에 쥔 종이 하나를 허리 뒤로 감추며 말했다.
"선생님, 저 지금 왔다가 조퇴하는 거예요.."
7시 50분까지 등교인데 8시 20분에 조퇴를 한다고..? 그제야 나는 그녀가 실내화가 아닌 운동화를 신고 서있는 것이 눈에 보였다. 학년을 올려 보낸 지 채 석 달도 되지 않았는데 그녀는 뭔가 많이 달라 보였다. 무엇보다도 그녀의 반짝이는 두 눈의 생기가 사라진 것 같았다. 내가 잠시 멍하니 그녀를 보고 있자 그녀가 내게 말했다.
"저한테 하실 말씀 있으시다고.."
맞다, 근데 지금은 곧 회의에 들어가 봐야 해서 안된다. 내가 난처한 표정을 짓자 그녀가 다시 말을 이었다.
"점심시간 괜찮으시면 저 다시 학교 들를까요? 선생님 뵈러 올게요."
"아냐, 학교 근처 카페에서 보자. 선생님이 아샷추 한 잔 살게."
우리는 고개를 끄덕이곤 각자 돌아섰다. 곧 점심시간이 돌아왔고 나는 외출 복무를 달고 그녀를 만나러 학교 근처 카페로 향했다.
그녀가 먼저 도착해 있었다.
"선생님 밖에서 보니까 훨씬 밝아 보이세요!"
너도 그래 이 녀석아. 나는 녀석의 장난스러운 인사에 웃으며 받아치곤 주문한 음료를 받고 자리에 앉았다. 그녀는 아까 전보다는 훨씬 덜 불안해 보였다. 그러나 아직 편안해 보이려 애쓰는 기운이 느껴졌다.
"산삼보다 귀한 고3이라 그런지 요즘 바쁘네. 얼굴 보기 힘들다고 다들 그리워하는 것 같던데~"
내가 먼저 입을 열자 그녀는 빨대를 손끝으로 톡톡 건드리며 눈꼬리를 흐렸다. 불편한 거겠지. 전에 본 적 없는 모습에 나는 걱정이 들었다.
"전에 반에서 인문학 프로젝트 했던 거 기억나? 그때 총괄 담당했었잖아. 마지막에 네가 한 발표 되게 인상적이었는데."
긴장을 풀려 지난 얘기를 꺼내자 그제야 그녀가 조금 편안한 듯 웃어 보였다.
"저 지난 2년간 진짜 열심히 산 것 같아요.."
맞아. 그리고 지금도 애쓰고 있잖아.
사실, 학교에 있으면 유독 눈에 잘 띈다. 버티는 자들이. 학교에서 힘겹게 자신과 투쟁하며 버텨내는 자들이. 도망치고 싶은 마음을 꾹 꾹 누르며, 비키지 않으려 버티는 모습이 짠하고 애처로웠다. 그리고 지금 눈앞에도 그런 모습이 보이니 마음 한편이 욱신거렸다.
"학교 잘 와야 하는 거.. 잘 아는데.. 교실에 있기가 너무 힘들어요. 성적 때문이라기보다는, 그것도 스트레스 요인이긴 하지만.. 친구들이랑 틀어진 게 큰 것 같아요. 네.. 그래요.. 선생님.. 힘들어서 도망치고 있어요 요즘.. 힘들어요 많이.."
오래 본 사이여서 일까. 나의 눈빛과 내 말의 행간에서 내 뜻을 읽어내고 오히려 그녀가 먼저 솔직하게 말해왔다. 나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더 묻지 않았다. 나는 그저 격려해주고 싶었다.
"너한테 힘이 되고 싶어 하는 사람들이 많아. 지금 담임 선생님도 그렇고 나도 그렇고.. 그리고 지금은 너한테 무척 중요한 때잖아? 너한테 중요하지 않은 사람한테 상처받지 말고, 너한테 중요하고 너를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많은 응원을 받아갔으면 좋겠어. 그 힘으로 살아내는 거야. 인간, 혼자서 못 버틴다. 산삼도 산신령이 다 관리해 주시는 거야~"
나의 농담 섞인 응원에 그제야 그녀가 조금은 마음 편히 웃어 보였다. 나는 그 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작년 이맘때 반특색 활동으로
인문학 책을 읽고 보고서를 작성하게 했었다. 활동이 끝난 후, 그 프로젝트의 총괄 책임을 맡았던 그녀가 활동 마무리 소감을 발표했을 때 그녀가 했던 말을 아직 기억하고 있다. 그녀는 도종환 시인의 흔들리며 피는 꽃을 낭송하고 말했다.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냐만은
피 흘리며 꽃 피울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저마다 아픔이 있을 수 있지만, 나을 수 없는 상처가 아닌, 자랄 수 있는 기반으로 다지며 성장하는 어른이 되고 싶습니다.
나는 학교를 나오기 전 챙겨두었던 그녀의 인문학 프로젝트 활동 보고서 복사본을 종이백에서 조용히 꺼냈다. 그리고 그걸 다시 그녀에게 쥐어주며 말했다.
"흔들릴 때는 초심으로!"
그녀는 곧 그것이 무엇인지 알아채고,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얼굴로 나를 바라봤다. 점심시간이 다 끝나가고 있었다. 나는 그녀를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주고 한번 꽉 안아주곤 다시 학교로 돌아왔다.
일주일쯤 지났다. 야간자율학습 감독을 하던 중 3학년 교무실에 들를 일이 있어서 잠시 들렀다가, 담임 선생님과 상담 중인 그녀를 다시 발견했다. 그녀와 눈인사를 했다. 그녀의 담임 선생님과도 눈인사를 했다. 다시 야간자율학습까지 참여하는 걸 보니, 왠지 마음이 놓였다.
나는 교무실을 나오며 다시금 생각했다.
꽃이 피기 위해서는 역시, 따뜻한 햇살과 토양, 충분한 물이 제일 중요하다.
학교라는 울타리 안에서 그녀가 즐겁게 춤추듯 이파리를 흔들며 꽃 피우길 바라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