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리를 두는 사람들
집착은 결핍이다.
과시도 결핍이고.
지금도 기억나는 여직원이 한 명 있다. 그녀는 하도 만나는 남자 친구 자랑을 많이 해서, 당시 직원 대부분은 그 남자의 직업이나 간단한 신상정보는 알고 있었다. 한번은 다 같이 모여서 티타임을 하는데, 역시 나에게도 대화 도중 남자친구 자랑을 해서 ‘서로 참 좋아하는구나’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 날 표정이 안 좋아 무슨 일 이냐 물었더니, 누가 잘못했는지 한번 들어보라며 남자친구와 싸 운 얘기를 했다. 한참을 듣고 나서 “아~ 그건 남자친구가 잘 못 했 네요~” 라고 했지만, 누가 봐도 남자만의 잘못은 아니었다. 하지 만 내가 거기서 만약 남자 편을 들며 “그건 OO 씨가 너무 예민하게 받아드린 것이 아닐까요?”라고 했다면, 난 분명 미움을 살 게 뻔했 다. 적당히 비위를 맞춰주고 다음부턴 피해 다녀야겠다고 생각했 는데, 그다음부터 남자친구와 싸울 때면 나를 찾아와 남자의 심리 를 남자니까 잘 알지 않느냐며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싸움의 내용은 별일이 아니었다. 남자친구가 퇴근 후 동료들과 술을 마셨는데 30분 동안 연락이 되지 않았다거나 회식 자리에서 주변 사람들 사진을 찍어 보내라고 했는데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 다는 것이다. 또는 전화기 너머로 여자 목소리가 들린 것 같다는 등, 확실하지 않은 정황에 불안해하며 집착을 했다.
그런 일이 있을 때면 안절부절못하며 일과를 보내던 그녀가 어 느 날은 환하게 웃으며, “저희 화해했어요~ 제 남자친구 나쁜 사 람이 아니에요 오해하지 마세요!”라며 가만히 있는 나에게 남자친 구 편을 들며 말했다. 어이가 없기보다는 가까이하면 안 되겠다는 생각에 하루에 목표 중 하나를 그 여직원을 피해 다니는 것으로 두 었다. 풍문으로 들었지만, 결국 그 커플은 7개월을 못 넘기고 헤어 졌고, 헤어진 후 이틀간 휴가를 쓰고 직장에 나오질 않았단다. 그 이후 늘 죽을상을 하고 회사에 다니다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다 른 남자를 만났다. 물론 새로운 남자친구에게도 집착은 계속됐다.
그 당시 회사에서는 연말이 되면 전 직원이 송년회를 하는데, 역 삼역 근처 삼겹살집에서 모였다. 식당 안은 좌식 테이블을 붙여 기 다랗게 나열되어 있었고, 술을 마시는 사람과 술을 마시지 않는 사 람들이 나눠 앉았는데 아직 내 옆자리가 비어 있었고 그 여직원은 아직 도착하지 않은 상태였다. 서둘러 내 옆자리를 채우려 했지만 늘 불안한 느낌은 틀린 적이 없다.
마침 들어오던 그 여직원이 내 옆에 와서 앉았고, 그간 통 얼굴 보기 힘들었다며 어디 지방으로 전출이라도 갔었냐며 나에게 술을 64 65 따라주었다. 술자리가 적당히 무르익을 때 회사 대표는 더 먹고 가 라며 카드를 주고 일어섰다. 여기저기서 안심하고 비싼 술을 주문 하는 소리가 들렸고, 내 옆에 있던 여직원도 한껏 술이 올라서는 나에게 하소연을 하기 시작했다
“팀장님~ 진짜 못 믿을게 남자에요~ 아세요?”
“그건…… 사람 나름이지 않을까요……?”
“그런가? 그런데 저는 왜 항상 데이기만 할까요?”
“왜요? 또 남자친구가 속 썩이나요?”
“그건 아닌데요…… 아니에요…… 죄송해요. 술 드세요”
“네 그럼 술 드세요.”
“왜 안 물어보세요?”
“아니라면서요.”
“하…… 알았어요. 술 드세요.”
“아…… 그럼 뭔데요. 말해보세요.”
“아니에요. 묻지 마세요.”
“하 답답하게 왜 그러세요?”
“왜 화를 내세요.?”
“아니에요. 화낸 거”
“화낸 거잖아요. 답답하다면서요. 팀장님도 제가 답답해요? 지 금까지 만난 남자들이 다~ 나보고 답답하고, 내가 숨 막힌대요.”
“미안해요…… 저는 그런 뜻이 아니고, 말하다 끊으시니 까…….”
“아니 남자들은 왜 다 그 모양이에요? 나 좋다고 해서 받아주면 나중에 바람을 피워요. 나같이 순종적인 사람이 어딨다고, 저도 여우처럼 밀당하면서 남자 마음 애타게 하고 싶은데, 난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떡하냐고요…… 밀당? 그게 사랑이라 할 수 있 어요?”
“아니 저에게 왜 그러세요, 제가 뭘 어쨌다고”
“팀장님도 같은 남자잖아요, 그러니까 남자 심리에 대해서 저보 다 더 잘 알 거 아니에요!”
“아니 제가 무슨 심리학 박사도 아니고…… 저 그리고 화공과 나 왔거든요. 일단 진정하시고 혼자만의 시간을 가져보는 건 어때요. 연애를 좀 쉬어보는 게…….”
“그럼 외로운걸요…… 저는 꿈이 빨리 시집가서 예쁜 아이도 낳 고 싶고…… 불공평해요. 남자는 나이 먹어도 시간적 여유가 있잖 아요. 반대로 여자 나이는 크리스마스니 30대가 되면 노처녀라는 막말이나 만들어내고.”
“저는 그런 말 만든 적 없어요. 생사람 잡지 마세요. 그리고 저도 한마디 하자면, 남자 좀 신중히 알아보세요.”
“저도 알아요. 그런데 이번엔 정말 다를 거라 생각했는데…… 이 번에도 역시나네요. 아 진짜 어떻게 해요! 전 진짜 사랑을 하고 싶 다고요. 진짜 사랑.”
술에 취했는지 계속 말을 쏟아냈다. 그 부서에서는 이미 취사를 알고 있었는지 큰 신경을 쓰지도 않았다. 주변은 여전히 시끄러웠 고 우리 둘 사이는 정적이 흘렀다. 술에 취해서 이제 몸도 잘 못 가 누는 여직원을 보면서 조금 안쓰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토록 남 자친구에게 집착하는 이유가 있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다를 거야. 이번에 만나는 사람은 내가 지 켜내야지 하는 마음에 더 애정을 쏟고, 주변 사람들에게 사랑을 과 시하며, 스스로 안도감을 얻으려 했던 게 아니었을까?
과시와 집착은 닳은 점이 많다. “바람피우는 사람이 제일 싫어!” “난 바람 같은 거 안 피워!” 또는 차 자랑, 돈 자랑, 애인 자랑, 인 맥 자랑 등, 무언가를 과시하고 집착하는 사람들은 사실 그것에 결 핍을 나타내는 것이다. 즉, 자랑하는 사람은 안쓰러운 사람들이 다. 어떻게 보면 나도 해당이 되는 일이기도 하다. 그러고 보면 나 도 안쓰럽고, 그도 안쓰럽고, 저 사람 또한 안쓰러운 일이다.
도서 <거리를 두는 사람들>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