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맛을 알아버렸다.

펜을 버리고 바늘을 쥔 이야기

by 삭정이


2012년 봄,

신혼생활은 행복했지만 직장에서는 나날이 바닥을 치던 그때, 뭔가를 배우고 싶어 퇴근 후 취미생활을 물색 중이었다.


조건은 하나

"내가 하고 있는, 해온 일들과 전혀 상관 없는 장르일 것"


그때 갑자기 떠오른 것은

정말이지 뜬금없는 '자수'

굳이 맥락을 찾아보자면 결혼 준비할 때 예단봉투와 티슈커버 같은 걸 사면서 자수소품의 예쁨을 맛보았다는 것 정도.


'자수'에 얼마나 다양한 장르가 있는지, 내가 원하는 건 어떤 '자수'인지도 모르고, 그저 지역 카페에서 생활자수를 배우며 소품을 만드는 모임이 있다기에 용기내 참석했다.

3월 어느 목요일, 퇴근 후 찾았던 카페수업이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지 못한 채, 생소한 취미생활이 시작되었다.


매주 한번씩 카페에서 듣는 자수 수업은 그야말로 힐링이었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가 들어올 틈 없이 몇 시간이 그냥 흘러가는 신비를 경험했다.



자수와 바느질을 시작한 이후

하루 끝에 머리가 복잡할 때는 만사 제쳐두고 수만 놓았다. 한땀한땀 수놓으며 무념무상을 유지하다 보면 무언가 하나 뚝딱 완성되어 성취감도 주니, 기효능감 최고조의 작업이었다.


무엇이든 배우는 것 좋아하는 사람이라 '자수도 더 깊은 세계가 있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올라올 무렵 '프랑스자수'라는 말을 알게 되었다. 생활소품에 소소한 자수 몇개 놓는 병아리에게 다채로운 스티치의 향연이 펼쳐지는 프랑스자수 작업들은 얼마나 유혹적이었던지. 2시간 거리에 있는 선생님을 찾아 본격적으로 수업을 듣기 시작했다. 이 모든 일이 두세 달 안에 벌어진 일. 여전히 생업에 종사하고 있을 때였다.




내 손으로 빈곳을 가득 채워내는 기분은 취미생활이 주는 힐링을 넘어서 좀더 창조적인 에너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실을 들고 원단을 오가며 예술 행위를 하는 듯한 착각을 일게 했달까.

새로운 취미를 배우겠다며 자수를 검색한 지 반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지만

무에서 유를 창조하는 이 일이, 사람들에게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이 일이, 지금의 내 일보다도 가치로와 보다.

경쟁이 난무하고 동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에게 즐거움을 선사하지도 못하는, 무엇보다 현재가 행복해지는 데 도움이 못되는 내 일을 그만하고 싶어졌다.


결과적으로 일을 그만뒀다.

멈춤을 고민하던 시기에 내 삶에 들어온 쌩뚱맞은 취미 하나가 고민을 현실화할 수 있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1년 뒤 취미였던 나의 자수놀이는 일이 되었다. 새로운 일을 하려고 일을 그만둔 건 아닌데 퇴직하고 쉬면서 시간이 흐르는 대로 살다보니 내 작업실에 앉아 있었다.

인생 참 알 수 없다.

시작은 취미생활이었지만

매일 몰입해 놓고, 아름다운 것들 눈에 담으러 다니고, 예술가의 마인드로 창작도 해보고 하다보니, 내가 정말 원하는 것에 대해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이 되었던 것 같다. 그 자연스러운 흐름이 새삼 감사하다.


어떤 취미든

그것이 취미로 그치든 새로운 일이 되든 반복되고 지루한 일상에 무언가를 배운다는 건 활력이 된다. 배운다는 것무언가 生하게 하는 기운이 있기 때문이다. 서른 둘 나를 소생케 하기 위해 바늘을 들었던 나는 그 후 십년 넘는 세월 "타인의 취미생활을 응원"하는 취미생활자 서포터로 살고 있는 중이다.




10년의 공부는 말짱 도루묵이었냐고?

노!

세상에 쓸모 없는 배움은 없다. 일례로 공부하며 익힌 계획 수립 스킬, 자료 수집 능력, 문서 작성 능력 같은 건 어디서 쉽게 얻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수업 계획, 교안 작성 등 일상에서 해오던 작업이 있었기 때문에 취미로 수놓던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으로 더 빨리 전환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함께 자수를 시작한 이들과 비교했을 때 내 준비가 훨씬 구체적이고 꼼꼼함을 보면서 나의 지난 10년이 허송세월은 아니었음을 깨달았다.

한번씩 대학원 등록금 마련하느라 이리 뛰고 저리 뛰던 세월이 불쑥 떠올라 결국 다른 일을 하며 살 거였으면 그리 애쓸 필요 있었을까....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었지만, 결론은 다시 이것.


그 시간들을 보내지 않았다면 나의 현재도 존재하지 않는다.
"

펜을 쥐고 보낸 시간들이 바늘 쥐고 꽃 그리는 현재를 만들어 냈다. 스티브 잡스의 말처럼 내 삶의 점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실수 혹은 실패로 보이는 나의 멈춤 역시 내 삶의 변화를 만들어낼 수 있는 계기였을 뿐이고, 과거의 모든 공부는 현재의 내 일을 조금 더 수월케 할 수 있는 동력이 되어주고 있었다. 그러니 걱정을 가장한 동정의 말들은 걸러 들어야 한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찍어내고 있는 숱한 점들이 훗날 의미 있는 선으로 연결되리라 믿고, 의미 없어 보인다는 놀림과 패배자 보듯하는 동정의 시선을 받더라도 나의 현재를 사랑하기로 마음 먹어야 한다.

손맛을 알아버린 자는 그렇게 결심하는 수밖에 없었고, 그 결심 이후 더 이상 내 삶을 의심하지 않았다.


나의 현재들이 연결되어 어떤 가치를 만들어낼지 아무도 알 수 없는데,
내 삶을 의심하는 새에 내 삶을 더 알차게 살기로 하는 편이 더 낫잖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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