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어나 이 정도로 열심을 다한 적이 있나 싶을 정도로 정성을 다해 아이를 키우는 시간이 이어졌다.
아이는 사랑스러웠고 가정은 평화로웠다.
자잘한 사건사고는 많았고, 아이의 성장발달에 맞춰 갖가지 고민 거리는 넘쳐났지만 전체적인 감정은 "행복"이었다.
하루에도 문득 '이렇게 행복해도 되나?' '행복이 이렇게 오래 지속되다니... 갑자기 큰 화가 몰려오는 거 아닐까' 이런 생각 따위를 할 정도로 행복했다.
엄마는 천상 현모양처였고, 우리를 알뜰살뜰 돌봐주는 다정한 사람이었다. 아빠는 가부장적이었지만 가정중심적인 사람이었고, 살가운 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주말마다 우리와 함께 하는 사람이었다. 40이 넘은 지금도 엄마아빠와 놀러다닌 기억이 생생한 걸 보면 8, 90년대의 경상도 가정 치고는 꽤나 다정하게 살았던 것 같다.
문제는 돈이었다.
원래도 없는 집이었지만 장남이라는 이유로 아빠 밑으로 딸린 식구들이 많았고, 할머니는 늘 편찮으셨다. 아빠 혼자 벌어오는 돈으로 다섯 식구(종종 삼촌들이 몰려오면 여섯, 일곱식구가 되었다가 최고로 많을땐 아홉식구도 있었다고 한다. 나는 기억 나지 않는 어린 시절에)가 먹고 살아야 했고, 엄마는 부족함을 채우려 늘 두어 개의 부업을 하고 있었다. 가끔 공장을 나간 적도 있었지만 아이들은 엄마가 키워야 한다는 아빠의 고집에 다시 집으로 돌아오곤 했던 엄마. 철 없는 어린이들은 공장 가는 엄마보다 집에서 부업하면서 우리 간식 챙겨주는 엄마가 좋아서 아빠의 고집이 반가웠다.
성실했지만 경제관념이 없는 아빠는 늘 주변인들에게 이용당하기 일쑤였고, 그 시절 망하는 집의 흔한 이유였던 보증이 문제가 되어 큰 빚을 떠안았다. 그 후에도 새로운 사업을 이유로 받을 수 있는 빚은 다 받고 다녔고, 엄마는 그런 중에도 아끼고 아껴 우리 학비를 모아두려 애썼다. 대학 입학까지는 시키자. 휴학을 반복하더라도 어떻게는 대학 입학금은 마련해 놓자. 이게 엄마의 목표였다고 한다. 그 사이 아빠 쪽으로는 계속 돈이 새고 있었다. 큰 빚을 작은 빚으로 막고 있는 상황이었다는 건 성인이 되고서야 알았다.
최악의 IMF시기를 지나 우리의 대입까지는 무사히 치렀다. 엄마의 1차 목표는 달성한 셈. 하지만 졸업까지는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늘 과외를 하러 다녔고, 동생을 온갖 알바를 다 하며 청춘을 보냈다. 학자금 대출은 당연했고,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아빠가 우리의 학자금대출을 사업용으로 쓰기까지 해 이제 우리의 빚도 늘어났다.
눈덩이처럼 빚이 늘어나 훗날 우리에게 피해가 가리라 생각한 엄마는 가족 모두를 데리고 신용회복위원회로 갔다. 그게 20대 중반의 일이다. 대학원에 갓 들어갔을 때였나...
우리 힘으로는 도저히 안 될 것 같다. 애들이라도 취직하는 데 문제 없게 만들어 놔야 한다. 엄마의 이야기에 아빠도 순순히 따랐고 가족 모두 개인회생에 들어갔다.
서른 살 즈음. 내 이름 밑에 붙은 빚들이 모두 사라졌다. 엄마아빠의 빚은 여전히 진행형이었지만 동생과 나는 다시 제로부터 시작할 수 있게 됐다.
그 무렵부터 나의 수입은 오롯이 나의 것이 되었다. 하지만 돈을 모으는 것은 또 다른 영역이었다. 빈곤한 가정에서 쪼들려 본 기억만 있지 돈을 불리는 교육을 받아본 적도, 그런 모습을 본 적도 없는 아이가 경제관념이 있기가 어려웠다. 결정적으로 나의 경제관념은 아빠를 닮았다. 하고 싶은 게 많았다.
버는 족족 돈이 새는 경험. 빚만 지지 말자. 그것만 해도 나는 성공한거라는 마음으로 살았다. 적금도 들어보고 이런 저런 상품 상담도 받아봤지만 도통 알 수 없었다. 2011년 남자친구가 결혼하자 했을 때 내가 가진 돈은 550만원이 전부였다. 스무한살에 만나 10년 가까이 만나온 사람이라 나의 지난한 과정들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라 그랬을까 550만원은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아무래도 대기업 입사 3년차의 호기로움이었지 싶다. 계산기 두드리지 않는 순정파 남자를 만난 바람에 550만원 들고 결혼을 했다.
신혼집은 작은 투룸 같은 데서 시작하게 되려나...이 집 저 집 보러 다니다, 결혼준비가 흔히 그렇듯 조금 더 보태면 빌라인데, 조금 더 보태면 구축 24평인데, 조금 더 보태면....이 더해져서 우리는 5년 된 아파트를 샀다. 마땅한 내 방 한칸도 없는 주택 셋방살이에서 나와 번듯한 내 집을 갖게 됐다. 엄마아빠 곁을 떠난다는 슬픔은 자리할 새 없는 찬란한 인생 2막이었다.
내가 인생 2막을 즐길 즈음 엄마아빠도 딸 결혼으로 한시름 덜었는지, 인생에 윤기가 더해졌다. '이제 나이도 있는데 다른 일을 벌이기보다 하는 일을 성실히 하자'라고 마음을 먹은 아빠는 열심히 돈을 벌었고, 엄마도 아빠를 도와 두배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몇 년 뒤 20년 묵은 빚들을 다 갚고 내집마련까지 일사천리로 해냈다. 30년 넘게 고단했던 엄마아빠의 결혼 생활이 나의 출가 이후 5년 정도만에 정리되었다. 시집간 딸에게 누가 되지 않도록 태어난 손주한테 누추한 할미할비로 보이지 않도록 부단히 노력한 결과였다.
돈 걱정이 없는 나날이라니
엄마아빠가 돈 빌려달란 소리를 안하는 나날이라니
무탈한 나날이 이어질수록 불안했던 건
그래본 적이 없어서였다.
원가정에선 언제나 돈이 문제였고, 돈이 문제가 되면 좋았던 사이도 날 서기 마련이었다. 초등 시기가 지난 이후로 단 한번도 집이 안식처였던 적은 없었던 삶에서 180도 달라진 나의 현재가 행복하면서도 의심스러웠다.
성실하고 다정한 남편, 그야말로 토끼같은 아들, 우리 손으로 가꾼 우리집.
550만원 들어있던 통장은 내가 일을 하지 않는데도 불어가고 있었고, 심지어 나는 취미생활도 영위하고 있었다. 남들에겐 너무 당연한 삶이 나에겐 의심스러운 삶이었다.
그러니 매일 밤 누가 이 행복을 앗아가진 않을까, 더 큰 화가 나에게 오지 않을까 불안했던 것이다.
우리집은 돈 이야기 하지 않는 집이다. "
(아빠를 닮아) 경제관념 없는 나는 돈에 밝은 남편에 경제권을 맡겼고, 카드를 받았다.
내가 일을 하고 있을 때 내가 버는 돈은 고스란히 내 것이었고, 차곡 차곡 모으든 어디에 쓰든 남편은 상관하지 않았다. 일을 관두고 임신을 하고 아이를 키우며 더 이상 수입이 없는 시기가 오자 생활은 남편 카드로, 나의 취미생활이나 잡다한 지출은 나의 저축으로 해결하고 있었다. 내가 어릴 때 그랬듯 외벌이 남편에 전업주부 포지션을 취하고 있지만, 우리는 돈이 모였고 아파트 대출금도 진작에 갚아버렸다. .
아이 앞에서 절대 쪼들린다는 소리 하지 않기.
돈이 없어 불안정해 보이는 모습 보이지 않기.
돈으로 싸우지 않기.
암묵적으로 약속한 부분들을 잘 해내고 있는 우리가 기특했다.
경제관념은 돈없다 소리에서 생기는 게 아니므로(나를 보면 알듯이) 아이에게 경제관념을 가르치는 것과 별개로 우리 가정은 대체로 풍족하고 여유로운 일상을 살고자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