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엔나, 모스크바, 프라하, 밀라노에서 5번 만나고 결혼했습니다.
2014년 여름, 오스트리아 작은 시골마을, 도이칠란츠베르크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그 해 여름이 가기 전 모스크바에서 두 번째 어색한 만남이 있었고, 그렇게 그가 모스크바를 다녀 간 뒤 롱썸(장거리 썸 타기)이 시작된 것 같았다.
클래식 음악의 도시 비엔나에서 성악 공부를 하던 무게 있는 남자(외모도 정신도 딱 봐도 가볍지 않았다...)는 나와 적당한 거리를 두며 내가 그어놓은 선을 넘지 않았다. 그의 신중한 행동 그리고 자상하고 유머러스한 성격에 조금씩 마음이 열리기 시작했다. 우리는 서로의 선 대신 국경을 넘으며 비엔나, 모스크바, 프라하, 밀라노에서 5번 만났고, 이듬해 그는 나를 5월의 신부로 만들어 주었다.
나의 제2의 고향 모스크바. 그리고 그 화려했던 S전자 해외법인 이 과장 타이틀을 미련 없이 버리고 노래하는 오빠를 따라 밀라노 새댁이 되었다.
밀라노 = 어른들의 놀이터
이탈리아는 성악가 남편에게는 과거와 현재가 공존하는 배움의 공간이며, 브랜드를 사랑하는 나에겐 작은 것 하나에도 이야기가 담긴 무한한 영감을 주는 장소였다.
새로운 나라였지만, 힘든 게 없었다. 남편이 살던 오스트리아보다 융통성 있고, 내가 살던 러시아보다 밝은 이탈리아에 우리는 금세 매료되었다. 모든 일이 잘 풀렸다. 남편은 꿈에 그리던 베르디 오페라 '라 트라비아타'의 제르몽 역으로 데뷔를 하게 되었고, 아주 적당한 시점에 우리에게 아이까지 생겼다.
모든 것이 완벽했다.
‘이’씨 성의 남편을 만났고, 우린 아들을 낳았으니 그 이름은 ‘이태리’. 내가 꿈꾸던 나라. 문화예술을 꽃피운 르네상스의 나라. 명품의 나라. Made in 이태리. 그렇게 나는 '이태리'의 엄마가 되었다. 꿈이 이루어졌다.
행복했다. 동시에, 해야 할 일도 많았다. 육아도 일도. 데뷔는 했지만 안정적인 삶은 아니었다. 빨리 남편을 브랜딩 하고 마케팅해야 했다. 명색이 브랜드담당, 마케팅팀장이었는데... 재능 있는 남편 하나 브랜딩 못하랴. 그러나 오페라의 본고장에서 내가 잘 모르는 분야에 뛰어들어 현지에 먹히게 하는 건 쉽지 않았다. 자금부족, 인력부족, 실력부족... (핑계지만, 마케팅에 마음껏 사용할 자금도 넉넉지 않고, 육아에 시간과 체력도 점점 고갈되니 인력부족인 거로..) 게다가 보고 들은 건 있으니 늘 완벽하기를 추구했고, 어설픈 건 시작조차 하지 않았다. 그래도 이것저것 해보겠다고 크고 작은 연주회들을 기획했으나 딱히 성과가 없었다. '일을 했으면 성과를 내라!' 이 말이 귓가에 맴돌며 마음을 후벼낼 뿐이었다.
첫아이니 육아에 욕심도 있어 낮시간엔 아이에게 올인했다. 초저녁이면 꼬맹이보다 먼저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 남편 브랜딩, 나 자신의 퍼스널 브랜딩, 또 새롭게 탄생한 뉴 브랜드 '이태리'를 브랜드화해보겠다고 이것저것 시도만 하고 끝맺지 못한 것들이 내 삶에 널브러져 있었다. 감사하게도 어떤 순간에도 좌절하지 않고 착하고 성실한 남편의 도움으로 다시 일어나곤 했다.
그래! 우리 잘 될 거야, 할 수 있어!!
BHAG - Big Hairy Audacious Goal.
꿈은 언제나 크게! 세계적인 오페라 가수, 그 정상을 향해 달려가던 어느 날!!! 코로나19가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