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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록 Jan 24. 2022

인간답게 사는 건 어떤 걸까요?

인간실격(2021), JTBC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들을 꼽으라면 여러 순간이 있겠지만 그중에서도 저는 2016년 여름과 2020년 가을을 떠올립니다. 그 해 여름과 그 해 가을은 다른 환경, 다른 공간에 놓여 있었지만 공통점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제가 원하는 모습으로 살 수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시기라는 점입니다.


 저는 어릴 적부터 꽤나 영특했던 것 같습니다. 공부로 먹고살 만큼 똑똑하거나 성실하진 않았습니다만, 남들보다는 조금, 아주 조금 더 공부를 잘했던 것 같습니다. 초등학교를 들어가자마자 저는 항상 받아쓰기 일등을 했습니다. 작은 섬의 분교였기 때문에 학급에 여덟 명 밖에 없었지만요. 당시 담임 선생님께서는 다정하게도 받아쓰기 일등을 할 때마다 선물을 하나씩 주셨는데, 저는 일 년 내내 그걸 받아 들고 집으로 향했습니다. 부모님은 당연히 기뻐하시고, 친구들도 항상 부러워했죠.


 일 학년을 마칠 즈음 작은 섬을 떠나 순천이라는 도시로 왔고, 한 학급에 마흔 명씩, 무려 열네 학급이나 있는 초등학교로 전학을 갔습니다. 거기서 저는 수많은 똑똑한 아이들 사이에서 조용히 자랐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이해할 수 없지만, 육 학년 때 저는 다시 똑똑해졌습니다. 역시나 저는 공부를 하지 않았지만 시험만 보면 반에서 항상 일등을 했습니다. 아직도 저는 그 장면이 기억이 납니다. 명절에 친척들이 모여 앉아 있을 때, 부모님이 저를 추켜세우던 순간을요. 저는 당연히 공부를 안 한다고 했지만 어른들은 수업에 집중을 잘하나보다, 이해력이 좋나 보다 하시며 좋은 말들을 해주셨죠.


 특유의 붙임성과 똑 부러지는 언변, 언제나 저는 가진 것과는 다르게 부풀려지곤 했습니다. 성장과정에서 겪은 그러한 결과들은 저에게 작은 불행의 씨앗을 심은 것 같습니다. 막연하게 잘 될 거라는 기대, 막연하게 잘 살 것이라는 착각. 합당한 노력을 한 적도 없으면서, 그럴만한 배경을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말이죠.


 그래서 그 해 여름, 저는 참 많이도 힘들었습니다. 학점을 다 수료하고도 무려 네 학기를 더 다니며 취업 준비를 했고, 끝내 대기업의 문턱 앞까지 갔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문을 열지 못하고 결국 원점으로 돌아와 버렸죠. 저를 괴롭혔던 건 그 불행의 씨앗이 심어 놓은 막연한 기대였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나의 모습에 대한 기대. 당연히 대기업에 들어가서 멋있게 사원증을 목에 걸고 다니는 모습. 그러나 그건 쉽게 이룰 수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내가 사실은 능력이 없는 사람인데, 너무 많은 기대와 찬사를 받으면서 살아왔구나. 이렇게 능력 없고 초라한 사람인데. 나는 결국 아무것도 될 수 없는 사람이구나.


 그리고 몇 년 후, 그 해 가을의 대학원 생활은 그 해 여름보다도 더 힘들었던 것 같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대기업에 들어갔지만 불행의 씨앗은 아직도 가슴속에 남아있었나 봅니다. 나는 더 나은 일을 해야 해. 더 멋진 일을 해야 해. 더 높은 자리로 가야 해. 내가 기대하는 나의 모습을 다시 이루기 위해 저는 과감히 퇴사를 하고 대학원에 진학을 했습니다. 퇴사를 하는 저를 보며 많은 선후배 동기들은 여전히 응원과 기대, 찬사를 보내주었죠. 역시 너는 달라, 너는 잘할 거야, 정말 멋있다, 더 좋은 회사를 가서 보여줘. 그러나 대학원 생활이 반년 정도 지났을 때쯤, 그 해 여름에 겪었던 극심한 두려움과 좌절감이 다시 몰려왔습니다. 세상에는 저보다 똑똑하고 더 성실하고 더 꿈이 가득한 사람들이 많았고, 저는 그들보다 나은 면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인간실격을 봤습니다. 아마 그 해 가을이었다면 보지 못했을 겁니다. 제목부터서 얼마나 우울하고 힘든 내용인지 짐작이 가니까요. 그래서 졸업논문을 다 통과하고, 재취업까지 한 뒤에야 결국 보게 되었습니다.


아버지, 나는 아무것도 되지 못했어요.
세상에 태어나서 아무것도 못 됐어.
난 노력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모르겠어.


 인간실격의 등장인물들은 하나같이 사회가 정의 내린 인간다움에서 멀어져 있는 사람들입니다. 대학원까지 나와 성공한 작가가 되려 했지만, 뱃속의 아이를 잃고 직장도 잃은 채 가사 도우미로 살아가는 부정. 과거에는 호스트바에서 일했으며 현재는 역할대행 일을 하는, 결국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은 자신의 삶이 두려워진 강재. 겉보기에 누구보다도 아름답고 화려하지만, 시한부 남편을 간병하며 살아가는 경은. 그리고 그들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 모두 하나같이 가면을 쓰고 위태위태한 모래성 위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뿐입니다.


보고 싶은 아버지,
세상에 똑같이 태어나서.. 아무것도..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자신의 인생이 실패한 것 같다는, 아무것도 되지 못한 것 같다는 부정과 강재의 대사를 들으며 저 또한 그 두려움과 좌절감이 어떠한 것인지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해 여름과 그 해 가을에 느꼈던 감정과 많이 닮아 있었기 때문이죠. 남들의 부러움을 사며 용기 있게 퇴사하고 대학원에 왔지만, 어쩌면 저는 아무것도 되지 못할 것만 같았습니다. 어쩌면 저를 그렇게 몰아치고 힘들게 한 건, 아무것도 되지 못하면 안 된다는 두려움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인간답다는 건 어떤 걸까요? 남들이 우러러보는 화려함 속에 사는 것이 인간다운 걸까요? 아니면 축복 속에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행복하게 사는 게 인간다운 걸까요? 우리가 말하는 인간답게 살라는 건 도대체 어떤 의미일까요?


 사람들은 모두 자신이 원하는 모습이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그 모습을 이루면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정말 흔치 않습니다. 누구나 편한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하고, 남들보다 더 많은 돈을 벌고 싶어 하고, 남들보다 더 크고 좋은 집에 살고 싶어 하며, 남들보다 튼튼하고 큰 차를 가지고 싶어 합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을 가질 수 있는 사람들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인간다운 삶을 살게 해주는 것이라면, 다 같은 인간으로 태어나서 사회가 정의 내리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없는 것이라면, 세상은 너무 잔인합니다.


 그래서 저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위로했습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아도 괜찮다. 내가 원하는 나의 모습이 아니어도 괜찮다. 나는 어디서든 나다. 나는 나에게 소중한 존재다. 제가 끝내 좋은 회사로 돌아가지 못하고 백수가 되어 부모님의 집에 얹혀살더라도, 부정이 결국에는 아이도 갖지 못하고 자신의 이름이 새겨진 책을 내지 못하더라도, 강재가 결국에 아무것도 되지 못하더라도, 인간으로서 실격이 아닙니다. 아무것도 되지 않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인간입니다.


 인간답다는 건 인간이 해줄 수 있는 것들을 인간에게 해주는 삶일 것입니다. 인간은 인간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기댈 수 있습니다. 서로 보듬어줄 수 있습니다. 진정한 인간다운 삶이란 이런 것을 의미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인간이 만들어낸 유형의 무언가를 성취하는 것이 아닌, 태초부터 인간에게 내재되어 있는 무형의 무언가를 나누는 것. 그것이 우정일 수도, 사랑일 수도, 연민일 수도 있습니다. 그것이 인간실격이라는 극이 종국에 말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는 인간답게 잘 살고 있습니다. 친구의 투정을 들어주며, 나의 투정을 건네며, 상사에게 혼나며 번 돈으로 부모님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드리며, 친구에게 맛있는 음식을 사주고 싶어 초라한 밥을 혼자 먹으며, 여섯 평의 좁은 월세방에 살며, 드라마를 보며 울며, 예능을 보며 웃으며, 가슴속에서 천 원을 꺼내 붕어빵을 사며, 지하철역 출구의 할머니들의 전단지를 받으며, 버스를 타며 기사님께 인사를 드리며, 낯선 사람에게 설레기도 하며, 어긋나는 인연에 아쉬워하기도 하며, 그렇게 인간답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불행의 씨앗을 쉽게 태워버리지 못하고, 무언가가 되려 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으려 하고, 원하는 것을 가지려 하곤 합니다. 그러나 스스로에게 계속해서 말합니다. 괜찮아. 괜찮아. 원하는 걸 얻지 못해도 괜찮아. 나는 그래도 나니까.


ⓒ JTB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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