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당탕탕 유럽여행일기 in 영국 런던
2022년 10월 9일
오늘은 내 생애 처음으로 혼자 여행을 했던 날이다.
물론 저녁에 다시 친구들을 만났기에 완전히 혼자는 아니었지만 짧은 그 시간 동안 많은 걸 느꼈다.
사실 난 지금까지 여행에 큰 관심이 없었다. 어렸을 때부터 먹고살기 바빴던 우리 가족에게 가족여행은 사치였기에 23살 먹을 때까지 해외여행은커녕 국내여행도 손에 꼽을 정도로 다녀왔다.
사실 이건 내 기질 영향도 있다. 성격 자체가 새로운 곳을 가고 새로운 일을 하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는 것보단 익숙한 곳, 익숙한 일, 익숙한 사람을 만날 때 더 행복을 느낀다.
그래서 난 여행 에세이 같은 걸 별로 안 좋아했다. 여행을 가야만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아 싫었다.
그랬던 난 오늘 런던 여행 덕분에 인생에서 여행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여행 무식자의 '첫 번째 홀로 여행 in 런던'의 여행 코스는 이러했다.
대영박물관-> 버로우 마켓 -> 테이트 모던 -> 저녁 -> 재즈 클럽
이 여행코스에서 가장 기대했던 곳은 '대영박물관'이었다. 역사책에서만 보던 유물들을 실제로 보면 어떤 느낌일까 너무 궁금했다.
대영박물관
처음 본 대영박물관은 역시나 사람들이 많았고 익히 들어온 명성대로 넓고 웅장했다. 너무 넓어서 여길 다 보려면 하루는 꼬박 걸릴 것 같았다. 그래서 난 보고 싶은 유물들이 있는 전시실만 골라서 갔다.
드디어 책에서 보던 유물들을 실제로 마주했다. 그런데 웬걸 유구한 역사를 가진 그 대단하고 유명하다는 전시품과 유물들을 봐도 별 감흥이 없었다. 그냥 '신기하다'는 감정 그 이상 그 이하도 안 들었다.
그래도 가장 인상 깊었던 전시를 꼽자면 이집트 사후세계와 관련된 유물들이 인상 깊었는데 미라를 볼 땐 '아니 그럼 내가 지금 고대 사람 시체를 보고 있는 건가..'싶어서 좀 무섭기도 했다.
한국 전시실도 인상 깊었다. 생각보다 전시실이 작아서 아쉽긴 했지만 대영박물관에서 마주친 한국은 생각보다 더 반갑고 뿌듯했다.
대영박물관을 나와 걸어가면서 그렇게 기대했는데 왜 감동하지 않은 건지, 실망감이 느껴지는 이유는 뭔지 곰곰이 생각해봤다. 기대를 너무 많이 해서 실망한 건가? 아님 내가 아는 게 없어서 그 유물들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 걸까?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해봤는데 답을 찾지 못했다.
그리고 마침내 그 답을 '테이트 모던'에서 찾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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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이트 모던
테이트 모던은 방치돼 있던 발전소를 리모델링해서 만든 현대미술관으로 다양한 모더니즘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다.
사실 테이트 모던에 대한 기대는 별로 없었다. 미술관의 분위기를 좋아해서 한국에선 종종 미술관을 가곤 했다. 하지만 미술 ‘작품'에 대한 선호도는 무에 가까웠다.
모더니즘 또한 그랬다. 싫어하지도 그렇다고 좋아하지도 않는 그런 '무'의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재밌고 즐거운 시간이었다. 내가 대영박물관에서 느낄 거라 예상했던 대부분의 감정을 이곳에서 느꼈다. 전시되어있는 거의 모든 작품이 다 좋았다. 테이트 모던에서 한 3시간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돌아다녔다.
6시 폐장 시간이 다 되어서야 겨우 테이트 모던에서 나온 난 바로 앞 스타벅스에 가서 핫쵸코를 시키고 지금까지 느낀 감정들과 생각들을 곱씹어봤다.
난 박물관에 있는 유물을 보는 것보다 미술관에 있는 작품들을 보는 것에 감동을 받는 사람이었다. 미슐랭 식당 음식이 어떤 사람에겐 맛없게 느껴지듯 그냥 박물관이 내 취향이 아니었던 거다. 내가 이상해서, 내 배경지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나라는 사람이 그런 취향을 가지고 있어서 그런 거였다.
오늘 알게 된 내 취향은 모더니즘 작품, 특히 그중에서도 역동적인 작품들, 영상이랑 접목한 작품이다
생각 정리를 하고 밖으로 나왔다. 부쩍 나라는 사람과 친해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 참, 버로우 마켓과 재즈 클럽에선 몰랐던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했다.
버로우 마켓
비위생적인 건 질색이어서 밖에서 서서 뭘 먹는 걸 제일 싫어했던 내가 버로우 마켓에서 쓰레기통 옆에 앉아 맥 앤 치즈를 먹었다. 배가 고파서였을까 그냥 모두가 그렇게 먹어서 나도 별 생각이 없었던 걸까 바닥 모퉁이에 앉아 그렇게 먹어도 '아, 너무 맛있다.'라는 생각밖에 안 들었다.
그렇게 열심히 먹다가 문득 '와.. 내가 이러고 뭘 먹을 줄은 상상도 못 했다'라는 생각이 들었고 웃음이 나왔다. 이런 새로운 경험들을 하고 새로운 내 모습을 발견하는 게 너무 재밌다.
아, 이게 사람들이 말하는 여행의 매력인가.
소호의 어느 재즈 클럽
원래부터 재즈엔 관심이 있었는데 이렇게 재즈 클럽을 가본건 처음이었다.
공연은 대 대 만족이었다!
이렇게 재즈를 좋아하면서 왜 이제야 재즈클럽을 가봤는지 그동안 나한테 너무 무심했던 것 같아 나 자신에게 미안해졌다.
생각해보니 이제까지 난 내 성격이 원래 그래, 새로운 걸 안 좋아해.라는 문장 속에 날 가두고 좋아하는 걸 알아가고 그걸 맘껏 좋아할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럴 시간이 없었다고 핑계를 대며 어리광 부리고 싶지만 냉정하게 생각하면 그럴 의지와 용기가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여행이 그 의지와 용기를 줬다.
비로소 나와 친해질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줬다.
아, 이게 바로 사람들이 말하는, 내가 그렇게나 부정하고 싶었던 '여행의 의미'인 건가.
테이트 모던, 재즈클럽.. 오늘 여행에서 좋았던 순간이 참 많았지만 가장 좋았던 순간을 꼽자면 대영박물관으로 가는 길, 그 길에서의 순간이었다.
러쉘 스퀘어
이곳과 사랑에 빠졌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을 가다가 우연히 발견한 러쉘 스퀘어, 새소리와 피톤치드가 난무하는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다.
날씨가 너무 좋았기에 잠깐 시간을 내어 러쉘 스퀘어를 천천히 둘러봤다. 초록빛 아래서 평화로운 일요일 낮을 즐기는 사람들이 보였다. 어떤 사람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먹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큰 나무 아래서 잠을 자기도 하고 또 어떤 사람은 사랑하는 사람과 피크닉을 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내 삶에서 저런 여유를 가진 순간이 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없었다. 나무 아래에 벌러덩 누워 책을 읽다가 스르르 잠드는 여유, 그 여유조차 나에게 허락하지 않았던 내가 바보같이 느껴졌다.
여유가 없는 삶, 그 퍽퍽한 삶을 벗어던지고 이제부터라도 저들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제야 마음속에 따듯한 초록빛이 스며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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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은 '나'를 알아가는 여정이다. 그게 바로 여행의 정의이자 의미가 아닐까?
여행을 하다 보면 내가 어떤 걸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알게 된다. 그렇기에 여행을 하다가 실망하는 경험은 충분히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호'만 아는 건 내 반쪽만 아는 것이다. '불호'도 알아야 비로소 내 전체를 알게 된다.
내가 이런 거엔 별로 관심이 없구나? 하는 걸 알게 되면 알게 될수록 좀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보낼 수 있는 기반이 생긴다.
대영박물관보다 테이트 모던에 더 감동을 받은 사람은 다음에 미술관을 가면 되는 거고, 테이트 모던보다 대영박물관에 더 감동을 받은 사람은 다음에 박물관을 가면 된다.
그렇게 각자 한 걸음씩 더 만족스러운 여행을 향해, 삶을 향해 나아가면 되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