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에서 쓰는 열한 번째 청춘일기
2022년 10월 25일
캠퍼스에 초록빛 나무가 무성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낙엽이 다 떨어지고 나무가 앙상해져 간다.
이제 점점 가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진다.
오전 수업이 끝나고 친구와 함께 처음으로 학식을 먹으러 갔다. 학식 치고 그렇게 저렴한 가격은 아니었다.
친구와 난 고기 덮밥을 시켜 먹었는데 나름 맛있었다. 하지만 ‘밀크 바’라고 폴란드의 김밥천국 같은 곳이 있는데 거기가 더 싸고 맛있어서 굳이 학식을 먹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아마도 우리의 마지막 학식이 아닐까 싶어 사진을 남겼는데 낙엽이 깔린 길에 덩그러니 서 있는 저 표지판이 왜 이렇게 쓸쓸해 보이나 모르겠다.
높고 푸른 가을 하늘을 조금 더 즐기고 싶어 산책을 하다가 비건 샌드위치 가게를 발견했다. 맛이 궁금했던 우린 하나를 사서 나눠 먹어보기로 했다.
우리 둘 다 한 입 먹고 눈이 동그래졌다. 너무나 맛있었기 때문에! 샌드위치 안에 들어있는 석류가 포인트였다. 얼핏 보면 안 어울릴 것 같지만 상큼하고 달달한 맛이 다른 재료들과 꽤 잘 어울린다.
유럽에 오고 내가 정말 좋다고 느낀 점 중 하나가 비건이 하나의 선택으로 보편화되고 존중받는다는 것이다. 비건 식당이 많고 어떤 식당이나 비건 메뉴가 있다.
다양한 선택을 할 수 있고 그 선택을 존중하는 자세, 분명 우리 한국 사회가 본받아야 할 점이 아닐까.
그렇게 거한 점심을 먹고 도서관으로 향했다. 깜깜해질 때까지 공부를 하고 오후 수업을 듣기 위해 강의실로 향했다.
벌써 밤공기에 겨울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입김도 조금 나는 것 같다.
천천히 겨울이 다가오는 소리가 들린다.
2022년 10월 27일
아무런 수업이 없는 목요일 아침, 러닝을 하기 위해 밖으로 나왔다. 조금 쌀쌀해진 날씨에 얼른 옷을 여몄다.
이곳엔 아직 겨울이 찾아오지 않은 건지 노랑노랑 한 단풍이 아직까지 들어있었다. 원래도 아름다운 공원이었지만 가을의 끝에서 자신의 모든 걸 다 털어내듯 더욱 빛나고 있었다.
원래 30분이면 끝나는 러닝을 한 시간도 더 한 것 같다. 낙엽들이 쌓인 길가와 알록달록한 나무들, 쨍한 햇빛.. 가을 그 자체인 이곳을 떠나기가 아쉬웠다.
러닝이 끝나고도 한참을 이 공원에서 어쩌면 바르샤바에서 마지막일 이 순간을, 이 가을을 즐겼다.
저번 ‘EP8 바르샤바에서 내가 해냄’에서 언급한 키르기스스탄에서 온 친구 ‘아이다이’에게 같이 점심을 먹자고 연락했고 우린 ‘hesu restaurant’이라는 한식집에서 같이 밥을 먹었다.
이름이 ‘혜수 레스토랑’이라 더 정감이 갔던 이 식당에서 난 잡채를 먹었다. 내가 한식 중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 잡채여서 항상 그리웠는데 진짜 한국에서 먹는 그 잡채 맛이 나서 좋았다.
배 부르게 밥을 먹은 우린 올드타운 산책을 했다.
쌀쌀해진 날씨에 손이 시렸던 우린 핫초코 하나씩을 사들고 올드타운 곳곳을 돌아다녔다.
키르기스스탄어, 러시아어, 영어, 한국어 등등 할 줄 아는 언어가 많은 아이다이를 보고 나도 한국으로 돌아가면 평소 배우고 싶었던 언어를 꼭 배워봐야겠다고 다짐했다.
근데 우선 영어부터 유창해지고..
각자 바르샤바 대학교에 어떻게 오게 됐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각자의 이야기 속에서 선택의 선택 끝에 바르샤바 대학교에 와 이렇게 서로를 만나게 된 게 참 신기하다는 생각.
이 얘기를 영어로 하려니 그 의미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답답했는데 아이다이가 자긴 한국어 알아듣는다며 한국어로 하라고 했다.
정말 똑똑하고 멋진 친구다.
나 정말 영어 공부, 언어 공부 열심히 해야지..
2022년 10월 28일
폴란드 친구 소피아가 애플파이를 함께 만들자며 자기 집에 초대를 했다. 바르샤바 외곽 쪽에 있는 소피아 집을 가기 위해선 기차를 타야 했다.
기차에서 내려 소피아 집으로 다 같이 걸어갔다.
분명 바르샤바지만 바르샤바가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는 한적하고 평화로운 동네였다.
10분 정도 걸었을까 너무나 귀여운 주택 앞에 도착했고 여기가 바로 소피아네 집이었다.
내가 생각한 유럽 집 로망 그대로를 실현해놓은 소피아네 집 마당, 낙엽이 무성한 걸 보아하니 여기에도 가을의 끝이 찾아왔나 보다.
애플파이를 만들기 전, 소피아는 우리에게 집 구경을 시켜줬다. 단란한 유럽 가족의 겨울 풍경이 절로 머릿속에 그려지는 cosy 하고 lovely 한 집이었다.
귀여운 강아지 두 마리까지!
집만 보고도 화목한 가족일 거라는 게 예상이 됐다.
소피아 할머니의 애플파이 레시피를 따라서 애플파이를 만들기 시작했다.
물론, 소피아 빼곤 아무도 폴란드어를 읽을 수 없었기에 소피아 셰프가 하라는 대로 했다.
사과를 잘라 계피 가루와 설탕과 함께 녹인 다음 빵 반죽 위에 올렸다. 그리고 겉은 쿠키 같은 식감을 만들기 위해 빵 반죽에 설탕을 더 넣어 반죽을 한 다음 사과 위에 올렸다.
오븐에 들어가니 정말 맛있는 구수한 빵 냄새가 올라왔다. 베이킹은 처음이었는데 이 냄새를 맡으려고 다들 집에서 베이킹 하나보다 생각했다.
빵이 구워지는 동안 소피아 아빠가 코치로 있는 청소년 농구부 경기를 보러 갔다.
팀 복까지 받아서 맞춰 입은 우리는 일일 치어리더가 되어 열심히 소피아 아빠네 팀을 응원했다. 생각보다 흥미진진한 경기에 집중하고 있던 우리에게 드디어 다 구워진 애플파이가 배달 왔다.
내가 먹어 본 애플파이 중 단연 일등이다. 정말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돌 정도로 맛있었다. 역시 할머니 레시피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진리인가 보다.
떨어지는 낙엽과 함께 쓸쓸함도 찾아오는 가을의 끝
바르샤바에서 만난 소중한 친구들 덕분에 한 톨의 쓸쓸함도 날 찾아오지 않았다.
가을이 떠나가고 겨울이 찾아오면서 부쩍 추워지는 날씨 속에서도 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들이 주는 따듯함이 내 몸과 마음을 녹인다.
이 가을의 끝을 함께 잡아 참 다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