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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세인 Dec 17. 2022

EP11 몰아치는 차가움 속에서 따듯함을 잃지 않도록

바르샤바에서 쓰는 열두 번째 청춘일기

2022년 11월 1일

오늘은 안개가 유난히도 자욱하게 낀 날이었다.

수요일이면 아침부터 수업이 있는 날이지만 오늘은 폴란드의 중요한 공휴일이라 학교를 비롯한 모든 곳이 쉬었기에 늦게까지 게으름 피울 수 있었다.

 

매년 11월 1일은 'All saints' Day' (‘모든 성인 대축일')로 로마 가톨릭 교회를 비롯하여 기독교에서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을 기리는 날이다. 하느님과 함께 영광을 누리는 성인들의 모범을 본받고자 다짐하는 날이자 먼저 세상을 떠난 모든 사람을 추모하는 날로 가톨릭 국가인 폴란드에선 아주 중요한 날이다.


이 날 폴란드 사람들은 공동묘지에 가 묘 앞에 향초를 피워 그들을 추모한다.

평소엔 어둠만이 가득했을 공동묘지는 사람들이 두고 간 수많은 향초들 덕분에 밝게 빛나고 있었다. 영화 '코코'가 생각나는 풍경이었다.

그 불빛이 어찌나 밝고 따듯하던지 죽음 뒤에 있을 그 세상이 오늘만큼은 어둡지 않고 밝게 빛나고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부디 이 불빛들이 한국에도 닿아 최근 안타까운 일로 우리 곁을 떠난 수많은 영혼들이 거기선 아프지 않고 행복했으면 좋겠다고 기도했다.


2022년 11월 11일

오늘은 빼빼로데이를 맞이해서 룸메이트 친구 제라와 함께 집에서 빼빼로를 만들었다. 2시간이면 충분할 거라고 생각한 빼빼로 만들기는 장장 5시간이 걸려서야 겨우 끝났다.

데코레이션부터 포장까지 우리의 정성이 가득가득 들어간 빼빼로를 보고 있으니 그렇게 뿌듯할 수 없었다.

우린 일본인 친구들과 대만 친구 '조이'를 집으로 불러 빼빼로를 선물해줄 계획이었기에 포장지에 간단히 편지도 적었다. 특히, '사랑을 담아'라는 문구는 구글 번역기로 번역한 일본어와 한자로 적었다. 몇 번을 썼다 지웠다 하며 최대한 예쁘게 적으려고 노력했다. (실패한 것 같지만 하하)

누군가를 위해 이렇게 정성을 들여 무언가를 만들고 준비한 게 오랜만이라 힘들기보단 오히려 즐겁고 행복했다. 요즘 들어 누군가를 기쁘게 해주는 일이 얼마나 즐거운 일인지 새삼 깨닫고 있다.


우리가 선물해 준 빼빼로를 받고 좋아하는 친구들을 보며 오늘도 그 가치를 몸소 느꼈다. 한국에 돌아가서도 소중한 사람들에게 내 마음을 전하는 걸 아끼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우리 집에서 한참을 떠들던 우린 자정이 다 되어서야 헤어졌다. 여느 때보다 특별한 바르샤바에서의 빼빼로데이 덕분에 한기가 돌던 우리 집에 따듯함이 가득 채워졌다.


2022년 11월 13일

수능 한파가 바르샤바에도 찾아온 건지 오늘은 유난히도 추운 날이었다.


수능을 치고 대학에 들어온 지 이제 꽤 지났는데도 수능 때만 다가오면 이상하게 우울해지고 불안해진다. 두 번의 수능과 두 번의 실패, 그때의 상처를 이젠 극복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직 그 트라우마가 남아있나 보다.

얼른 이 무기력함과 우울에서 벗어나기 위해 무작정 밖에 나가 내가 좋아하는 일을 했다. 좋아하는 카페에 가서 맛있는 케이크와 커피를 시켜 먹었다. 노트북은 가져가지 않았다.


공부나 일을 하지 않고 카페에서 여유롭게 커피를 마시는 게 얼마만인지 이 사소한 여유가 조금은 내 기분을 나아지게 했다.

올드타운에서 보고 싶었던 쇼팽 콘서트도 봤다.

연주가 시작되고 난 조용히 눈을 감고 음악에 집중했다. 온갖 잡념 때문에 시끄러웠던 머릿속이 차분히 가라앉는 느낌이 들었다. 마음속을 헤집어 놓던 우울과 불안도 점점 희미해져 갔다.

그렇게 서서히 시렸던 내 마음에 따듯함이 스며들었다.


2022년 11월 18일

오늘은 폴란드 친구 소피아와 같이 영화를 봤다.

난 이상하게 예전부터 기분이 안 좋으면 영화관을 간다. 영화를 좋아하는 것도 있지만 ‘영화관’ 자체를 좋아해서다. 영화관의 은은한 어두움과 팝콘 냄새, 조용하지만 활기찬 분위기.. 그 모든 것들이 날 편안하게 한다.

영화관에 앉아서 영화를 보고 있으면 이상하게 보호받는 느낌도 든다. 이유는 모르겠지만 그냥 영화관의 그 모든 분위기가 날 그렇게 느끼게 하나보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공간인 영화관에서 좋아하는 사람과 영화를 보는 일은 언제나 행복하다.

내 우울의 특효약이랄까.

영화를 다 보고 집으로 들어가는 길, 첫눈이 내렸다.

마치 내게 이제는 다 잊고 행복하라는 말을 건네는 것 같이 하얗고 예뻤다.


2022년 11월 20일

마음이 복잡할 땐 러닝이 최고다. 오로지 내 몸과 마음에 집중하는 시간이기에 러닝을 하고 나면 고민이 사라지고 머릿속이 깔끔하게 정리된다.


두 번의 수능을 치면서 난 노력이 배신당하는 경험, 나 자신이 한없이 작아지는 경험을 2년이나 겪었다. 그건 분명 내게 큰 상처를 남겼다. 하지만 지금까지 난 상처를 마주하기 무서워서, 건드리면 아플까 봐 약도 바르지 않고 상처를 아무렇게나 던져두었다.

그냥 던져두면 아물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단단히 곪아있었다. 최근 내게 들이닥친 불안과 우울 덕분에 곪아 터진 내 상처를 보았고, 바르샤바에서 보낸 따듯한 11월 덕분에 이젠 그 상처에 약을 바를 용기가 생겼다.

러닝을 다 끝내고 난 드디어 그 상처에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였다.


이젠 그저 상처가 잘 아물기를, 그리고 내 삶의 하나의 흔적이자 자랑스러운 흉터로 남기를 바라본다.


수능이 다 끝난 지금, 어쩌면 좌절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그들에게 하고 싶은 말


우린 19년 동안 지겹도록 '수능과 대학'이 인생의 전부라는 말을 들으면서 자라왔어요. 학교에서 그리고 사회에서 그 첫 관문을 실패하면 인생 전체가 실패하게 될 거라는 이상한 세뇌를 받아왔죠. 그래서 저도 그 첫 관문을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는 생각에 많이 힘들어했어요. 어쩔 땐 '남은 인생을 살 필요가 없겠다.'는 못난 생각도 할 만큼?


하지만 성인이 되고 '수능과 대학'이라는 천편일률적인 목표가 아닌 진정한 내 삶의 목표를 찾는 시간들을 겪고 나니 그게 정말 생각보다 별 거 아니었구나, 절대 내 인생이 그 점수 가지고 판단될 수 없겠구나 하는 걸 깨닫게 됐죠.


바르샤바에 오고 더 넓은 세상에서 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그 실패는 내 인생에 조그만 생채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는 걸 더욱 여실히 깨닫고 있답니다.

시험이든, 사랑이든 인생은 뭐든 뜻대로 되지 않더라고요. 그러니까 지금 실패도 당신의 노력이 부족해서, 당신이 못 나서 그런 게 아니랍니다. 그러니까 지금 상처가 났다면, 맘껏 슬퍼하고 좌절하고 아파하세요. 저처럼 너무 오래 좌절하지 말고 얼른 연고를 바르고 밴드를 붙여서 내 삶의 자랑스러운 흉터로 남기세요.


그 실패, 그 상처들이 어쩌면 내 인생에 '필요악'이었구나, 하는 순간이 찾아올 때가 있을 거랍니다.


인생의 새 페이지를 쓰게 될 여러분을 응원하고 또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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