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장세인 Oct 22. 2022

EP2 사랑에 빠지는 순간

바르샤바에서 쓰는 세 번째 청춘일기

2022년 9월 25일 오전 7시

오늘도 유난히 눈이 일찍 떠졌다.

한국에서는 알람을 10개씩 맞춰 놓아야 겨우 9시에 일어날까 말까 한 사람인 내가 바르샤바에 오고 7시면 자동으로 눈이 떠지기 시작했다. 뭐 부지런해지는 것 같아 오히려 좋다.

아침은 따뜻한 차를 마시는 걸로 시작한다. 뜨끈한 차가 몸속으로 퍼지면 차가운 아침 공기에 잔뜩 움츠러든 몸이 그제야 깨어난다. 차를 다 마시고 이부자리까지 정리하고 나면 하루를 시작할 준비가 끝난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니 내 일을 할 수 있는 시간이 많아져서 좋다. 요즘 나에게 내 일이라고 함은 브런치에서 일기를 써 내려가는 것.

좋아하는 노래를 들으며 그리고 어제 마트에서 산 빵과 토마토를 먹으며 글을 쓰는데 가슴속 깊은 곳에서부터 나 자신이 충만해짐을 느꼈다.


문득, 글을 쓰는 걸 업으로 삼는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글과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아침이 지나고 12시에 바르샤바 와지엔키 공원에서 열리는 올해 마지막 쇼팽 음악회를 보기 위해 집을 나섰다. 날씨가 너무너무 좋았다.


지하철을 타러 가는 길

너무 귀여운 신발 수선 가게를 발견했다. 마치 스크루지 할아버지가 운영하는 신발 가게 느낌이다. 물론, 이 가게 사장님이 스크루지 할아버지 같다는 말은 아니지만.

바르샤바에 와서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보는 내게 황당한 일이 발생했다.

현금으로 paper ticket을 끊었는데 이 놈의 기계가 내 잔돈 2 즈워티를 꿀꺽 먹어버린 것이다.

한국이었으면 기계를 퍽퍽퍽 쳐서 잔돈을 받아냈겠지만 폴란드여서 참았다.

바르샤바의 지하철역은 이렇게 생겼다.

보자마자 뭔가 어디서 많이 봤다 했는데 평양 지하철역 느낌이다. 뭐 물론 평양 지하철역을 실제로 가본건 아니지만 사진으로 본 적이 있는데 이 지하철역과 비슷하게 생겼다.


지하철에서 내려 조금 걸으니 와지엔키 공원이 나왔다. 날씨가 유난히 좋아서 그런지 너무 아름다웠다. 공원 한쪽에선 마라톤도 열리고 있었는데 그것마저 낭만적이었다.

천천히 길을 따라가다 보니 쇼팽 음악회가 열리는 곳이 있었고 사람들이 북적거렸다.

올해 마지막 쇼팽 음악회라 그런가 사람이 정말 많았다. 벤치에 앉은 사람, 서있는 사람, 잔디밭에 누운 사람.. 참 다양하게 많았다.

우린 피아노가 잘 보이는 잔디밭 한편에 앉았다.

따듯하기보단 강렬한 햇살이 내리쬈다.


연주회 시작 5분 전, 나름 한산했던 잔디밭에도 어느새 사람들이 가득 찼고 바르샤바 대학교로 교환학생을 온 또 다른 한국인 친구를 만났다. 첫 만남이라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싶었지만 만난 지 얼마 안 돼서 연주가 시작했기에 그러지 못해서 아쉬웠다.

연주가 시작되고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공원에 잔잔한 피아노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피아노 소리에 따라 평화로움이 공기 속에 흘렀다. 나도 그 평화로움에 몸을 맡겼다.

photo by soomin

주변을 둘러보니 앉아서 가만히 연주를 듣는 사람도 있었고 누워서 눈을 감고 연주를 즐기는 사람도 있었다. 그 모습이 참 평화롭고 좋아 보였다.


나도 눈을 감고 그 분위기를 즐겨 보았다.

머릿속에 있던 잡생각이 사라지고 걱정과 근심이 씻겨 내려가는 것 같았다.

photo by soomin

아마도 후에 한국에 돌아가 바르샤바를 추억한다면 이때의 기억이 가장 먼저 떠오르지 않을까.

따듯한 햇살, 얇게 울려 퍼지는 피아노 소리, 주위에 있는 모두가 평화로워 보이는 이 순간.

photo by soomin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마지막 건반이 연주자의 손에서 떠나고 길게 울려 퍼지는 박수 속에서 행복했던 시간이 막을 내렸다.


연주회가 끝나고 우린 'stary dorm'이라는 레스토랑에 점심을 먹으러 갔다.

폴란드 전통 요리를 파는 곳이었는데 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와-"하는 감탄이 나왔다. 동화 속에나 나올 법한 식당이 내 눈앞에 있는 것이다. 안내받은 자리에 앉아서도 계속 주위를 둘러보면서 감탄했다.

우린 폴란드식 족발인 '골롱카'와 육회 '타타르'를 시켰다.

난 오늘의 수프도 시켰는데 토마토 수프가 나왔다. 수프인데 걸쭉하지 않고 면이 들어가 있어서 토마토 칼국수..? 느낌이었다. 글로 적으니 정말 이상해 보이는 데 나름 맛있었다.

친구는 새우요리를 시켰는데 버터향이 강한 감바스 느낌이었다. 맛은 별 3.5개 정도?

그렇게 다른 음식들로 조금씩 배를 채우고 있던 중에 '골롱카'가 나왔다.

골롱카 요놈이 정말 요물이다. 껍질은 바삭한데 속은 촉촉해서 진짜 환상적인 맛이 난다.

'겉바속촉'이라는 말은 사실 골롱카를 두고 하는 말이 아닐까.

고기와 같이 나온 소스랑도 너무 잘 맞았다.

골롱카와 사랑에 빠진 순간이었다!


그렇게 호들갑을 떨며 골롱카를 해치우고 있는데 셰프가 우리의 '타타르'를 만들어주기 위해 홀연히 나타났다.

우리가 보는 앞에서 고기를 다지고(?) 양념을 해서 바로 만들어주었다. 너무 신기한 경험이었다.

맛은 향신료 향이 강한 육회 느낌?

여기 와서 새롭게 알게 된 게 하나 있는데 내가 향신료 향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

그래서 그런지 향신료 맛이 많이 나는 '타타르'도 내 스타일은 아니었다. 경험한 것으로 만족한다.


이렇게 맛있는 음식에 빠질 수 없는 게 있다.

바로 맥주!

우린 얼른 맥주 3개를 시켜 1인 1 맥주를 했다. 원래 술을 별로 안 좋아하는 나인데 폴란드 맥주는 쓰지 않고 고소해서 계속 생각나는 묘술을 부린다.

종업원이 직접 맥주를 따서 따라줬는데 우리가 엄청 신기해하면서 영상을 찍으니까 굉장히 흐뭇한 얼굴로 쳐다보았다. 맥주 따는 거에도 까르르 거리며 좋아하는 우리가 너무나 관광객스러워서 그렇게 본 게 아닐까.


그렇게 종업원도 우리를 따라 웃다가 친구 물 컵에 맥주를 따라 버렸다.

당황한 종업원에게 우리는 괜찮다며 손사래를 쳤지만 나중에 다 먹어갈 때쯤 우리에게 미안하다며 디저트 케이크를 챙겨주었다.

아름다운 여성분 3명이 있어 자기가 실수했다며 굉장히 스위트한 말을 남겨 소소한 설렘도 가져다준 해프닝이었다.


그렇게 야무지게 모든 음식을 다 먹고 밖으로 나왔는데 너무 배불러서 우린 일단 주변 공원을 좀 걷기로 했다. 그냥 산책하러 들어간 식당 옆 공원이 또 너무 이뻐서 다시 한번 바르샤바와 사랑에 빠졌다.


공원의 아름다운 풍경이 식사를 마무리하는 가장 완벽한 디저트가 돼 주었다.

산책을 하고 집에 돌아와 쉬고 있는데 친구가 올드타운에 있는 성당에 가려하는데 같이 갈 것이냐고 물었다.

올드타운을 한 번도 가보지 못 한 난 친구를 따라가 보기로 했다.

처음 가 본 올드타운은 역시나 너무 아름다웠다.


내가 생각하는 유럽의 모습을 a부터 z까지 갖춘 곳이랄까. 올드타운에 빠져서 헤벌레 하고 있는데 갑자기 동네에 종소리가 울려 퍼졌다.

친구가 곧 미사를 시작한다는 걸 알리는 종소리라고 했다. 우리는 얼른 성당으로 향했다.

성당에 들어서자 종교가 없는 나도 절로 고개가 숙여지고 손을 맞잡게 되는 성스러운 분위기가 나를 감쌌다.


미사를 보는 것도 처음이었는데 심지어 폴란드어로 미사를 보다니 정말 내 인생에 다시없을 경험을 했다. 그냥 눈치로 찬송가도 부르고 기도 시간엔 폴란드에 있는 동안 건강하고 무탈하게 있을 수 있기를 기도했다.


부디 내 기도가 닿기를 바라본다.


사랑에 빠지게 되는 건 의외로 쉽다.

어떤 찰나의 순간에 우리는 사랑에 빠진다.


예를 들면, 산뜻한 아침 공기를 마시며 글을 쓰는 순간이나 따듯한 햇살 아래 피아노 연주를 듣는 순간,

좋은 사람들과 맛있는 음식을 먹는 순간 같은 사소한 순간.


오늘 그 찰나의 순간들로 난 사랑에 빠졌다,

이 도시와.

매거진의 이전글 EP1 친해지는 중입니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