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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세인 Dec 06. 2023

EP14 안녕, 바르샤바

한국에서 쓰는 마지막 바르샤바 청춘일기

호기롭게 시작한 바르샤바 라이프 2막은 건강 이슈로 올해 5월에 급하게 마무리됐다.

너무나 갑작스럽게, 그리고 힘들게 마무리돼서 처음엔 억울하고 바르샤바가 밉기도 했는데

지금은 이 마지막 덕분에 100배는 단단해진 나를 본다.

길게 보면.. 어쩌면.. 완벽한(?) 마무리이었을 수도.


올해 2월 개강하고부턴 정말 바쁘게 지냈다.

한 학기 더 연장해서 바르샤바에 있는 만큼 어떤 성과를 내야 한다는 강박.. 이 생겼다.

인생에 여유로움은 절대 허락하지 않는 내 고질병이 도진 거다.


우선, 폴란드어 공부해서 폴란드어 시험 A2 합격증 들고 한국 돌아오려고 했다.

(처음엔 B1이 목표였음. 미친 거지)

그래서 수업 끝나면 카페나 도서관 가서 공부하고,, 그랬다. 사실 공부하면서 즐거웠어서 후회는 없는데 말도 안 되는 목표를 세워놓고 스트레스받아했던 시간만은 후회된다. 그냥.. 즐겁게 배우고 오면 됐을 일을 K-대학생 기질 발동해서 부득부득 자격증이라는 성과를 내려고 했던 게 안타깝다.


거주증 준비하는 것도 꽤 시간과 노력이 필요했어서 그런지 내가 좋아서 시작한 유튜브, 브런치, 블로그가 점점 부담이 됐다. 학교에서 하는 글로벌멘토까지 더 해져서 매주 과제하는 기분으로 글과 영상을 업로드했다. 부담이 되면 좀 쉬면 되는 것을.. 그때의 내 융통성 없는 성실함이 안쓰럽다.


그렇게 학교 수업에 폴란드어 공부, 거주증 준비, 글/영상 업로드까지 다 하다 보니 바르샤바에 와서 무엇보다 좋았던 여유로움이 사라졌다. 어디에 취직했다더라, 졸업을 한다더라 하는 친구들 소식이 들릴 때마다 내 불안한 마음을 바쁨으로 채웠다.


그러다 보니 여행 갈 때 확실하게, 후회 안 남게 놀아야 된다는 생각에 미친 계획을 세워서 갔다.

4월엔

핀란드 로바니에미

헬싱키

스웨덴 스톡홀름

네덜란드 암스트르담

벨기에 브뤼셀

이렇게 4개국 5 지역을 9일 동안 여행했다. 지금 생각하면 대체 어떻게 했지 싶다.


5월엔 브로츠와프와

체코 프라하를 여행하고

독일에 피아니스트 조성진 공연도 보러 갔다.

벅차게 아름다운 곳들과 멋진 공연들을 봤다.

분명, 행복했다. 몸이 힘들어도 행복했다.

"그러니까 그 아름다운 곳을 좀 여유롭게 씹고 뜯고 맛보고 오지!!"라고 그때의 나에게 외치고 싶지만 뭐..

딱 그 나이 때만 할 수 있는, 젊음 하나 믿은 호기로운 여행을 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런 내 맘과 달리 몸은 지칠 대로 지치게 됐나 보다.

수술을 해야 할 정도로 몸이 안 좋아져서 급하게 모든 걸 마무리하고 한국으로 귀국했다.


꿈, 여행, 공부..

그 어떤 것도 놓치지 않으려 해서 탈이 나긴 했지만 그걸 다 해낸 나 자신이 한편으론 대견하다.


바르샤바라는 새로운 곳에서 오롯이 홀로 선 시간들,

그리고 건강 때문에 강제로 쉬게 된 한국에서의 시간들 덕분에 지금은 예전과는 전혀 다른 마음가짐으로 세상을 바라보게 됐다.


적어도 삶을 살아갈 마음가짐에 있어서 내 인생은 바르샤바 전과 후로 나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무엇보다 분명한 건, 지금의 난 바르샤바에 처음 도착한 그때의 나보다 훨씬 단단해졌다.

바르샤바 가기 전으로 돌아간다면, 마지막이 이렇게 아플걸 알지라도 난 그때와 다름없는 선택을 할 것이다.  

망설임 없이, 바르샤바로 떠날 것이다.


안녕, 바르샤바

                                                                              

Epilogue

5월 병원에 있던 어느 날,

아파서 지쳐 잠든 날 밤 새벽 4시 15분에 겨우 눈이 떠졌다. 어제와 똑같이 보이는 병원 천장과 익숙한 병원 냄새. 아직은 깜깜하고 조용한 공간이 야속하게도 날 둘러싸고 있다. 다시 잠들 수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대로 다시 자기 답답한 마음이 들어 휴대폰을 들었다. 폴란드에서 친구들과 주로 사용하던 메시지함에 쌓인 문자가 눈에 띄어 들어가 봤다. 멕시코 친구 알리가 보내온 연락이 미리 보기로 보였다.


‘Missing u, now who will I go to the library with?’


처음엔 오랜만에 친구가 생각나 살짝 웃다가 갑자기 눈물이 왈칵 났다.

폴란드어 수업이 끝나고 친구랑 같이 걷던 길.

난 시험이 어제 끝났다, 발표를 준비해야 해서 너무 싫다.. 시시콜콜하게 나누던 대화들.

도서관에서 어디에 앉을까 자리를 찾던 그 모든 순간들이 스쳐 지나가면서 사무치게 그리워졌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다 정원에서 피자 한 조각 같이 먹고 웃고 떠들던 장면이 환하게 머릿속에 그려지면서 내가 지금 그걸 할 수 있다면, 몸이 아프지 않아서 그 순간을 조금만 더 즐기고 왔었더라면 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지 못하는 현실이 슬퍼 눈물이 계속 났다.


아프지 않았을 땐 그 순간들이 이렇게까지 그리울 줄은 몰랐는데 아프고 나니 유명한 곳에 갔다거나, 엄청난 페스티벌에 갔다거나 하는 순간보다 이런 일상 속 평범한 순간들이 더 그립다.

그땐 평범한 일상 중 하나였는데.. 지나고 나니 이렇게 소중할 걸 그때 알았으면 그 순간을 더 즐겼을 텐데

그 순간의 나를 그리고 너를 마음속에 더 담아뒀을 텐데


이제 보니 내 교환학생 생활은 그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다 채우고 있었다. 갑자기 끝나게 된 교환학생 생활에서 그리운 건 유럽 여행도 바르샤바도 아니었다. 바르샤바에서 만난 소중한 인연들과 보낸 시간들, 그 사람들 자체였다. 그걸 까먹고 여행에 목매려고 했던 날들이 아깝다.


몰라, 그냥 오늘은 알리와 따듯한 캠퍼스 거리를 걸으며 과제 투정을 하면서 도서관에 가고 싶은 새벽이다. 우릴 비추던 따듯한 햇살, 함께 웃던 웃음 조각들이 그리워서 눈물이 찔끔 나는 새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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