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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다시 여기, 온 힘을 다해 ‘부정’을 ‘부정’한다

아직 오지 않은 봄을 기다리며

by 세인

느지막한 봄눈이 내렸다.

입춘은 지난 지 오래지만 여전히 바람은 춥고 시린 바람에 몸이 떨린다. 모두가 벚꽃이 피는 따듯한 봄을 기다리고 있지만, 지금 우리가 기다리는 건 봄만이 아닌 것 같다.


곧 현직 대통령 탄핵 소추에 대한 결과가 나온다. 불과 몇 해전 대통령이 탄핵되는 걸 두 눈으로 지켜봤는데 다시금 또 이런 일이 생기다니, 불행한 일이다.

분명 우리 사회가 어딘가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신호다.


작년 12월 일어난 비상계엄과 지금의 탄핵 소추 국면, 분열된 국민들.

이는 느닷없이 일어난 일이 아니다. 지금까지 우리가 바로잡지 못한 일들에 대한 결과다.

풍요로움을 향한 가차 없는 경쟁, 흑백논리에 사로잡힌 사회, 권력 투쟁으로 얼룩진 정치..

무엇을 더 먼저 해결해야 할까,

사실 이런 고민이 무의미할만큼 각자 심각한 문제자 또 서로가 서로에게 영향을 주는 연결된 현상이다.


이젠 바로 잡아야 한다.

지금의 혼란이 무책임한 과거에서 비롯됐다면

미래의 혼란을 막기 위한 기회는 현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있다.


우리 사회의 질적 변화를 위한 거국적 노력의 시작은 무엇보다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에서 시작해야 한다.


헌법의 수호자인 대통령이 반헌법적 절차와 내용으로 계엄을 선포하고 군을 동원해 국민들에게 총칼을 겨누고자 한 그 부정을 부정하는 일말이다. 법과 민주주의의 테두리를 벗어난 권력이 이에 합당한 정치적, 법적 책임을 지는 일말이다. 정치는 폭력이 아닌 대화와 타협의 기술이자 이는 헌법적, 민주적 틀 안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 당연한 명제를 다시금 확인하는 일말이다.


이는 민주적 리그를 벗어난 권력자에 민주적인 방법으로 단호히 응징하는 것에서 시작해야 한다.


모든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오는 것

법 앞에 누구나 평등한 것

그것이 우리가 지켜온 법치주의이자 민주주의다.

이는 정파적, 이념적 이해를 벗어난 근본적 일이다.


부정의 부정이란 개념은 리영희 선생님의 ‘광복 32주년의 반성‘이란 글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부정을 부정하는 작업이 어떻게 실패했는지, 그게 우리 사회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논리적으로 잘 정리한 글이다.


본질과 무관한 것들이 정치적 이해에 따라 난립하며 본질이 흐려지고 식민 지배, 군부 독재.. 그 제도들이 남기고 간 것 그러니까 우릴 부정한 것들을 청산하지 못한 채 제자리로 돌아가는 일이 반복됐다.


지금 이 탄핵 심판의 본질은 뭘까.


정치활동을 금지하고 언론, 집회, 결사를 막는 등 반헌법, 반민주적인 계엄 선포령을 통해 민주공화국인 대한민국의 민주적 체제를 흔들려한 시도

국민을 대표하는 헌법기관인 국회를 행정부의 수장이 군대를 동원해 봉쇄하고 삼권분립을 파괴하려 한 그 밤

자신의 이해관계에 따라 정치의 영역을 폭력의 영역으로 바꾼 권력자의 과오


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게 하는 것이 탄핵 심판의 본질일 것이다. 이는 내란죄와 관련된 형사 재판과는 또 다른 국민의 심판이다.


지금 이 본질을 흔들려하는 시도를 곳곳에서 볼 수 있다. 법조인의 법기술에 따라서든, 정치인의 정치적 이익에 따라서든, 미디어의 경제적 이익에 따라서든 과거와 한 점 다른 바 없이 본질과 무관한 것들이 누더기처럼 붙어 본질을 가리고 있다.


공수처의 내란죄 수사 적법성, 헌재의 졸속 재판 논란..

그것이 시사하는 바가 없다는 게 아니라 이를 이용해 탄핵 심판의 내용과 본질을 흐리지 말라는 거다. 지금 소위 ‘논란’이라 불리는 그 어떤 것도 그날의 과오를 씻을 순 없다.


대통령이 최종 변론에서까지 호소한 종북과 반국가세력을 척결하고 국민들을 계몽하겠다는 말 또한 본질을 가리기 위한 누더기에 불과하다.


정말 대통령이 그 목표를 이루고자 했다면, 21세기 민주사회에서 대통령이 말하는 그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을 지키기 위해 해야 했어야 할 일은 계엄이라는 폭력적 수단이 아닌 정치, 대화, 숙의로 국민을 설득하는 일이다. 민주사회에서 계몽은 권력자의 폭력적 강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교육과 토론, 개개인의 고민으로 선택적으로 이뤄가는 일이다.


하지만, 대통령은 그러지 못했거나 혹은 않았다.

폭력은 아무것도 해결해주지 못한 채 또 다른 폭력을 낳았으며 한국 사회를 분열과 혼란의 소용돌이에 빠지게 했다.


계엄이라는 극단적 상황까지 발생한 한국 정치의 양극화, 무분별한 탄핵과 거부권의 반복, 의회와 행정부의 불합치.. 이런 문제를 해결하지 말자는 얘기가 아니다.

이는 엄연히 폭력이 아닌 정치로 풀어야 하는 문제다.

그렇기에 대통령이 선택한 수단과 방법이 잘못됐다는 말이고 이런 폭력적 수단과 방법은 안된다고 선을 긋는 것, 그게 바로 이 탄핵 심판으로 해결해야 하는 본질이다.


누군가는 단지 권력자가 자리에서 물러나는 것만으로 모든 일이 해결되느냐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지금 부정을 부정하는 일은 시작일 뿐이다.

하지만, 만일 우리가 그 시작마저 하지 못한다면,

우린 우릴 부정한 그 부정을 절대로 부정하지 못하고 부정 속에 살아가게 될 것이다.

피로 지켜낸 헌법적, 민주적 체제는 사라지고 그 빈자리엔 폭력 만이 남게 될 것이다.


하지만, 우린 언제나 우릴 지켜내 왔다.

지금 다시 여기서 국민의 심판으로, 모두의 온 힘으로 부정을 부정할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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