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by 정소이

좋은 어른이 된다는 건.


침대에 누워 별스타그램을 둘러보다, 글 하나에 시선이 멈췄다. 예전에 함께 일했던 PD가 방송 후일담을 적은 글이었다. 직업에 대한 애정과 작업물에 대한 자부심이 곳곳에 묻어났다. 꽤 스스럼없이 자신의 감정을 드러낸 그 글을 보며 사무실에서의 그의 모습이 떠올랐다. 유능하고 친절했지만 늘 사람들과 거리를 두는 사람이었다. 일하는 종종 실망스러운 모습도 보고 안 좋은 평판을 듣기도 해 나 역시 먼저 다가갈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우리 사이에 조그마한 변화가 있었던 건 내가 퇴사를 고민할 즈음이었다.


그의 경험이 내게 도움이 될 것 같아 조언을 청했다. 사실 평소 친분이 없던 터라 큰 기대 없이 걱정스레 물었던 것 같다. 의외로 그는 하던 일을 중단하고 내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더니 꽤 따끔한 조언과 현실적인 대안, 덧붙여 본인의 경험까지 진솔하게 답했다. 헤어짐의 순간까지 거리감이 좁혀지진 않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장래를 희망하는 후배에게 진심을 다해 조언해줄줄 알았던 그는 내게 좋은 어른이었다.


문득 사회에 갓 발을 내디뎠을 때 그를 만났다면 조금은 더 친해졌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의심보단 믿음이 강했던 시절, 난 나와 함께 일하는 어른 대다수가 ‘좋은 어른’ 일 거란 이유모를 믿음이 있었다. 자연스레 호감과 신뢰를 바탕으로 쉽게 곁을 내줬다. 불행히 내가 믿음과 신뢰를 줬던 어른들은 어느 순간엔 좋은 어른이자 좋은 사람이었지만 어느 순간엔 후배 열정 팔아 제 몫을 챙기는 어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거기엔 여러 유형이 있었다


내 노동력을 갈취하며 사석에서는 걱정해주는 유형. 내가 지금도 제일 헷갈려하는 유형이다. 이들은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지 않는다. 잔심부름시키지 않고 시킬 땐 꼭 미안해한다. 늘 친절하고 권위적이지 않다. 오히려 친근하게 대하며 "오늘 일 많아? 먹고 일해 맛있는 거 사줄게~"등 걱정이 담긴 멘트들을 자주 한다. 그런데 회사 일 자체가 아주 많이 많아 늘 야근이고 인력이 부족하다고 말하면 해결해보겠다고 말하고 소식이 없다. 대부분 회사 내에 발언권이 별로 없다. 또 결정적인 순간에 절대 후배들을 위해 목소리를 내지 않는다. 모르쇠로 일관하고 나중에 걱정해준다. 또 친말감을 가장해 본인 일 떠맡기기를 가르침으로 포장한다.


나의 경우 이런 상황이 되풀이되자 모든 말이 삐딱하게 들리고 칭찬조차 노동력 갈취의 밑밥인가 하는 의심이 커지기 시작했었다. 실제로 이런 유형의 한 어른에게 "세상에 안 힘든 일은 없어."라는 말을 듣기도 했다. 노동력 갈취가 심할수록 사석에서의 친밀감이 공포로 다가왔다. '또 얼마나 일을 시키려고 저러지....' 싶어서.


입으로는 세상 좋은 사람인척 하며 뒤로는 노답인 유형도 있었다.

직업정신을 강조하며 이 직업을 막 시작했을 때 좋은 선배의 표본 같은 느낌을 많이 준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언행불일치 사례를 계속 목격하게 된다. "나는 불의를 보면 못 참아"라고 왕년의 전성기를 말하다 실제로 불의가 눈앞에 닥치면 공동체의 결속력을 강조한다. 실력이 제일 중요하다며 공정성을 강조하지만 본인 윗 상사가 불공정한 요구를 하면 아무렇지 않게 그걸 후배들에게 전달한다. 그러면서도 본인은 도덕성을 잃고 싶지 않아 하는 모습을 계속 보임. 이 경우 초반에 믿음과 신뢰를 줬다가 실망하는 경우가 많다. 나에게 안 좋은 일을 하지 않더라도 주사, 폭언 등 비상식적인 행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 정이 뚝 떨어지고는 했다.


마지막은 제일 최악이었던 대놓고 갑질 유형이다.

권위 오브 권위를 내세우는 독재자형. 개인적으로 심리적 타격은 2번보다 덜 입었다. 애초에 기대와 신뢰가 없어서 실망할 게 없는 기분. 대신 초짜일 때 눈치를 많이 보게 되고 쪼렙인 나의 무기력함과 무능력함에 전의를 잃고 화병을 얻었다. 휴유증이 길었다.


이외에도 자잘하게 실망스러운 모습들을 보며 생각한다. 좋은 어른이 되기란 너무 어려운 일이겠다고. 반대로 우리가 상식만 지켜도 좋은 어른이 될 수 있는 세상인데, 이게 왜 어려워진 걸까 참담하기도 하다.


술자리에서 선배가 "네가 선배가 되면 알겠지만 선배가 더 어려워, 후배들 대하는 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꼰대 짓인지 아닌지 생각하게 되고 조언하나 쉽게 못해."라며 선배의 어려움을 토로한 적이 있다. 아마 어른이 되어가며 겪는 어려움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다. 너무 어려운 일이라면 난 딱 두 개만 해볼까 한다. 내가 한 말은 그대로 지키기(언행일치), 상식적인 사람 되기. 그럼 너무 좋은 어른까진 아니라도 조금 좋은 어른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아, 잘 늙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