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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잡글

엄마의 가을

by sooowhat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에게 부모를 평생 각인시키는 일과도 같을까.


20년이 훌쩍 지났는데도 늘 9월 이맘때 쯤이면 반드시 떠오르는 기억이 있다. 중학교 3학년 운동회 날이다. 3학년의 2학기는 10대 시기 3년의 고비를 넘고넘어 남은 친구들과 가장 찐하게 친해졌을 시점이었다. 그렇기에 그 가을은 그토록 설레는 계절이었다. 그 계절 속에 운동회가 열렸다. 모두가 사복을 입고 참여하는 몇 안 되는 행사였다. 그말인 즉슨, 친구들 앞에서 옷 자랑에 기필코 성공해야 하는 기회의 날이기도 한 것이다. 그것이 15살 여자애에게는 얼마나 중요했던가.


그 해 운동회를 위해 나는 엄마에게 위아래 폴로 후드집업과 트레이닝 팬츠를 새로 사달라고 졸랐다. 당시에 각 벌당 10만 원 이상은 족히 했던 것 같다. 그때까지만 해도 엄마에게 그정도 요구하는 것은 살짝 눈치는 보이나 아주 참아야 할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다소 무리이더라도 엄마가 내게 충분히 해줄 만한, 일종의 의무처럼 여겼다.


그리하여 나의 당당한 요구에 엄마는 일언반구 잔소리도 없이 그 옷을 사주었던 걸로 기억한다. 턱턱 새 옷을 사줄 수 없는 카드 할부 인생인 걸 내 딸이 모르고 졸라댄 건 아니라고 믿었던 걸까. 결국 사줄 거 굳이 쓴소리를 보태지 말자고 싶었던 걸까. 나는 그때 엄마의 복잡했을 속은 신경도 안 쓴채, 나의 권리(?)를 큰 마찰 없이 행사해냈다는 데에 만족했다. 마음 가뿐히 새 옷을 입고서 파란 가을 하늘 아래 중3 마지막 학기의 추억을 즐겼다. 마음에 쏙 드는 새 착장을 하고 친구들 앞에 나선 뿌듯함이 아직도 생생하게 매 계절 하늘에 새겨져있다.


이유가 돈 때문이든 훈육 때문이든, 엄마는 내 요구를 거절해도 되는 사람이었다. 미성년 자식은 별 수 없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엄마는 내 야심을 기꺼이 실행시켜 준 것이다. 몇번이고 상상하며 완성시킨 모습으로 운동화에 나선다는 계획은 중3짜리 세상의 전부였다. 언젠가는 동네에서 옷 좀 잘 입는 애로 자리매김하는 게 세상의 전부는 커녕 일부도 차지하지 않게 된다. 그런 세상도 금세 오는 것이다. 그럼 엄마는 그 또한 알고 그때 내 편을 들어줬을까.


그래서 가을 바람 선선해지는 계절이면 나는 운동회와, 새 옷과, 엄마가 떠오른다. 그날 달콤하고 떠들썩한 분위기에 취해, 앞으로의 인생에서도 나는 계속 오늘처럼 멋진 사람으로 남을 수 있을 거라는 근거 없는 확신에 찼던 날. 그 어린 가슴이 부풀고 또 부풀었던 가을날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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