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표'의 무게감을 뚜렷하게 느꼈던 감각이 언제였던가. 생각해보니 고3 입시 때가 마지막이었던 것 같다. 그땐 목표 대학에 못 들어가게 되는 상황을 늘 시뮬레이션 하며 목표에 대한 무게를 지고 살았다. 오히려 취업 준비를 할 땐 고3 때처럼 반드시 이루고 싶다는 무게감을 느끼진 않았다. 그보다는 '일단 방향은 세팅했으니 그곳을 향해 흘러가는 대로 가보자'는 심정에 가까웠다. 가는 길에 뭐가 안 되거나 틀리면 어쩔 수 없이 방향이 바뀔 수도 있겠지, 정도였달까. 대입을 바라보던 때의 단순하고 깨끗한 중압감, 그 명료한 욕구와는 달랐다.
그렇다면 목표가 주는 무거움은 자기 확신에서 오는 것일까. 간절히 원하고 그래서 목표로 설정한다는, '원함'에 대한 감각 말이다. 19살 그때 이후로 나는 그 어떤 것도 '확실하게' 원해본 적이 없다. 대입의 목표를 어느 정도 달성하고 난 이후의 과제들은 내게 100% 전력을 다 하기에 다 조금씩 모자랐다. 무엇도 열렬히 원하지 않게 되었다. 그러니 무엇도 나를 짓누르지 않았다. 정확히는 원한다 말할 수 없었다고 해야겠다. 왜냐하면 무엇인가를 원해야 할 타당한 이유를 더이상 찾지 못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원해도 될만한 현실가능성, 그리고 그에 걸맞는 합당한 열정까지 있어야 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게 됐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원함에 대한 허들을 높여버린 것이다.
그렇게 나는 한두 살 더 나이 먹으며 아예 갈망하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되었다. 대신 적당히, 비교적 원한다고 느끼는 곳을 향해 방어적으로 접근했다. 첫 직업도 그렇게 갖게 되었다. '이 일을 확실히 원한다'고 말하기에는 늘 내 마음이 약하다고 생각한 탓에 입밖에 내지도 못한 몇가지 꿈들은 영영 자취를 감췄다. 당연히 직업인으로 생활하는 시간은 성취로 와닿지 않았다. 누군가 일에 대해 물을 때면 "흘러흘러 오다 보니, 여기에 와 있네요" 라고 습관적으로 얘기하곤 했는데 이는 겸손에서 하는 말이 아니었다. 내 선택의 여정을 스스로 폄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 요즘은 이 생각을 많이 하고 있다. 다음 챕터에서는 내가 다시 주인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어릴 때처럼 명료하게 무언가를 원해보고 싶다. 원함에 누구의 허락도 필요치 않은 확신을 되찾고 싶다. 더이상 백만 가지 이유를 대며 나의 욕구를 의심하지 않고 싶다. 욕구를 의심하는 것은 결국 나 스스로를 의심하는 것임을, 서른 여섯이 되어서야 깨닫는다. 어릴적 취미와 취향이 해를 거듭하며 흐려진 것도,제일 좋아하는 음악과 영화를 나열하는 게 무엇보다 어려워진 것도 다 그래서였음을.
다시 출발하기에 늦은 건 없을 테지. 이제라도 깨달아서 다행이라 생각하려 한다. 하고 싶은 것도 되고 싶은 것도 없어진지 오래인 삶에 다시 어린 마음을 주고 싶다. 뭘 원하든 괜찮다고. 너는 원할만 하다고, 원해도 된다고. 나에게 말해주고 싶다. 그래, 지금 나는 다시 원하는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