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치동 삽니다>
그날의 나는 좀 바빴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언제나처럼 신문 한 귀퉁이의 tv편성표를 찬찬히 읽어 내려가는데 꽃보다 남자 재방송이 두 회나 예정되어 있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이다. 저녁 6시에 시작하는 영어 학원을 빠질 필요는 없었지만 숙제는 포기해야 했다. 숙제를 한 번만 더 안 해오면 엄마에게 전화하겠다는 선생님의 엄포가 생각이 났다. 하지만 그 목소린 너무 작았다. 그날 그 시간, 난 한 번쯤 더 안 해간다고 큰일이 일어나지는 않을 것만 같은 영어 숙제 대신 F4 오빠들을 택했다.
하지만 진짜 고민은 재방송이 모두 끝난 후에 생겼다. 공들여 숙제를 할 순 없지만 빈손으로 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하게 남아버린 것이다. 마음 편히 놀까? 조금이라도 해? 빼곡한 숙제 표를 펼쳐놓고 생각에 잠겼다. 꽃보다 남자 재방송을 보지 않았다고 한들 절대로 다 끝내지 못했을 숙제들을 바라보며 더도 말고 딱 하나만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다니던 학원은 대치역 부근에 위치한 대형 영어 학원이었다. 대치동 일대의 중학생이란 중학생은 모두 모여드는 곳이었다. 밤 10시 건물 1층에서 이뤄지는 영단어 구두시험으로 유명하기도 했다. 매 시간 치르는 단어시험에서 낙제를 받은 학생들은 수업이 끝난 뒤 선생님을 따라 옹기종기 1층으로 내려가 일렬로 줄을 서고 구두로 단어시험을 봐야 했는데, 매일 밤 그곳에서 초등학생부터 고등학생까지 그 짧은 시간에 영단어를 외우겠다고 아등바등하는 풍경이 장관이었다.
중학생 반은 일주일에 두 번, 두 시간 반씩 하는 수업 5시간 중에 한 시간이 원어민 수업으로 배정이 되어 있었다. 미국 내지 캐나다에서 온 원어민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 번 수업에 들어와 특별한 교재 없이 대화만으로 수업을 진행했다.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어딘지, 그 이유는 무엇인지 몇 마디를 주고받고 나면 시간이 다 지나있어서 꼭 쉬는 시간이 한 시간 생긴 것 같아 우리는 그 시간을 아주 좋아했다. 원어민 선생님은 수업이 끝날 때쯤 온라인으로 에세이를 제출하는 숙제를 내줬다. 어차피 한국인 선생님이 내준 숙제는 다 못할게 뻔하고, 조금 끄적거려봤자 티도 안 날 게 뻔하니 원어민 선생님이 내준 유일한 숙제, 온라인 에세이를 완성하기로 마음먹었다.
시간은 5시, 학원까지 20분. 에세이를 쓸 시간은 30분.
지시문은 온통 영어였다.
어쩌고 저쩌고 ……pros and cons…….
사전 같은 걸 찾아볼 시간이 없었다. 아는 단어를 조합해 아는 단어로 에세이를 완성시켜야 했다.
“앞에 주저리주저리는 도무지 뭔 소린지 모르겠고, pro? pro라면……. 아, ‘프로’ 할 때 프로! 프로답다 할 때 프로가 그 프로겠고, cons... 콘은 옥수수?”
스스로의 기가 막힌 순발력에 감탄하며 프로와 옥수수의 상관관계에 대한 에세이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pros and cons의 뜻이 장단점이라는 것을 알았을 땐 그로부터 일주일 후, 다시 만난 원어민 선생님이 수업 시간에 지난 에세이 과제를 언급할 때였다. 나는 틀림없이 0점이겠구나 생각이 들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사안에 대한 장단점을 써오랬더니 프로와 옥수수의 상관관계에 대해 논하고 있었다니. 얼굴이 하얗게 질려서는 다리를 덜덜덜 떨며 에세이 채점 결과를 기다렸다.
'F' 내지는 'extremely bad' 따위의 온갖 부정적인 평가가 예상됐던 바로 그 에세이엔 커다란 'B+' 표시와 함께 'Very good:)'이라고 적혀있었다. 어려도 그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이 사람, 한 번도 에세이를 읽은 적이 없다는 것을.
에세이를 전해주며 미소 짓던 선생님은 내 에세이를 한 번도 읽은 적이 없었다. 숙제를 완벽하게 완성한 적도, 최선을 다해서 단어시험을 본 적도 없었지만 그 미소는 나에게 꽤나 충격이었다. 이 커다란 학원에서 언제나 바쁜 선생님들과 수많은 교실을 꽉꽉 채운 학생들이 생각이 났다. 나는 꼭 이상한 나라에 살고 있는 것 같았다. 학생들은 무엇을 배우는지, 선생님은 무엇을 가르치는지 알지 못한 채 일주일에 몇 번씩이나 같은 공간 같은 시간에서 만나야 하는 그런 이상한 나라.
pros and cons
명사_장단점, 찬반양론
*모든 등장인물의 이름은 가명을 사용했습니다.
*세이브 원고 소진까지 요일과 상관없이 업로드됩니다.
*구독으로 응원해주세요
<대치동 삽니다>
매주 수요일 / 토요일 연재됩니다.
contact: soobin3466@naver.com
더 읽어보기
https://brunch.co.kr/@soobin3466/14
http://brunch.co.kr/@soobin3466/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