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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덩어리의 무의미"

[우리들의 글루스:글쓰기연습] (4) 정한아의 <3월의 마치>를 읽고

by 수빈조

정한아의 장편소설 <3월의 마치>의 이마치는 알츠하이머 전 단계 진단을 받은 예순살의(혹은 일흔살의) 배우다. 제제 라는 명찰을 단, 그녀 나이의 절반도 되어 보이지 않는 뇌의학 전문가에게 상담을 받고 있다. 지인의 추천에 따라 제제로부터 대안치료를 받게 된 그녀는, 일의 더미로 꾹꾹 눌러 뇌 구석구석에 찌그러지고 납작해진 채 잊혀진 것도 온전한 것도 아닌 고통스런 삶의 부분들을 펼쳐 들여다보는 중이다.


그녀의 증세는 곳곳에서 산발적으로 시작된 것처럼 보인다. 이십대 중반 배우가 된 이후 한 번도 간 적 없는 대중목욕탕에 가는 꿈을 꾼 날 돌연 “머릿 속이 하얗게 된 것처럼 대사가 떠오르지 않았”고, 우여곡절 끝에 재건축한 아파트에 팔 년 만에 홀로 입주하고 실종되었다 믿는 아들의 방을 똑같이 복원하면서부터이며, 이사한 후 어쩐지 낯익은 남자의 목소리를 듣기 시작하고부터다. 몇 번의 시행착오 끝 “카메라 앞에 서면 무엇이든 가능하다는 느낌이 사라진” 후 자연스러운 은퇴수순을 밟게 되었다.


그녀는 오래 거주했던 아파트가 재건축 하는 8년 동안 호텔생활을 했고 우여곡절 끝에 재건축을 완료한 신축아파트 ‘라파트멍’으로 입주한다. 이십일년 전 실종된 아들 때문이었다. 당시 일곱살이었던 아들은 홀로 집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모든 것은 이사로부터 시작되었다.고 그녀는 생각한다. 이사 후 매일 악몽을 꾸고 불면증에 시달렸으며 이사 직후 자신을 부르는, 익숙하다 생각하지만 누구인지 알 수 없는 20대 초반 아니면 중반의 남자 목소리를 듣는다. 이사한 날부터 이마치는 촬영장에서 대사 실수를 반복한다.


주변인들의 권유에 국내 제일의 뇌질환 권위자를 찾아가 알츠하이머 전 단계 진단을 받았고, 주치의의 후배인 젊은 의사 제제에게 대안치료를 받게 된다. 제제는 이마치에게 남은 기억을 토대로 일종의 뇌지도를 만들거라고 한다. 이마치가 젊은 의사에게 받게 되는 대안치료는 그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내는 것처럼 진행되는 듯도 하고 때때로 그저 통 안에 들어가 잠드는 것 같이 뇌파를 자극하는 것 같기도 하는데, 이 기계의 이름 역시 ‘라파트멍’이다. 이순간 독자인 나는 어디서부터가 이마치의 실제 기억이고 어디서부터가 왜곡된 기억인지 혹은 상상일뿐인지 알 수 없어진다. 더불어 앞선 상황들마저 부정하거나 의심하게 되기도 한다.


심지어 이마치는 “자신이 점점 미쳐간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고 작가는 쓴다. "물건을 잃어버리고, 잠옷 바람으로 외출하고, 자신의 이름을 깜빡하는 것도 모자라 이제 망상과 대화하는 버릇까지 더해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이마치는 정말 무료했다. 그녀의 삶을 채웠던 그 수많은 말들이 사라졌다. 그녀는 혼자서라도 떠들 수밖에 없었다. 망상 속 유령은 그녀의 유일한 관객이었다”고 작가는 말한다.


어떤 것이 온전한 사실인지 알 수 없는 가운데서도 주인공 이마치는 수십층의 ‘라파트멍’의 곳곳을 돌아다니며 흡사 아파트의 호수별로 보관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주요 사건들 전후 자신의 과거로 찾아가고 과거의 자신을 만나 기억하고 재사유하며 때론 젊었던 자신을 위로하기도 하는데 이 과정은, 너무 고달파서 지워버리고 싶기도 했던, 또는 부정하고 싶었던 과거의 사건들을 기억으로 복원해내기 위한 사투와도 같은 과정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래서 또 다시 독자인 나로 하여금 알츠하이머를 앓고 이를 치료하기 위한 목적의 이 행위에 대해서마저도 왜 이토록, 그녀는 기억을 되찾고 싶어하는가 라는 의문을 품게 하기도 한다.


작가는 이런 이마치에 대하여 “망각과 상관없는 삶의 방식이었다”거나 “생존 이상의 것, 그것을 꿈꿔본 적이 없었다. 알지 못하는 것을 꿈꿀 수는 없는 법이었다”라고 대변하고 “그럴듯한 유년을 위해, 환상을 위해, 경멸과 수치를 면하기 위해 스스로 만든 거짓말. 결국 자기마저 속인 거짓말”이라고 극한 평가를 내놓기도 한다. 그리고 종국에 온전히 기억을 잃어 오로지 딸만을 기억하는 일흔 살의 이마치에게 세계는 “한덩어리의 무의미”가 된다. 망각이 주는 축복이기도 하고 동시에 존재적 무의미를 뜻하기도 할 것인 “한덩어리의 무의미”의 상태에 도달해서는, 현실을 온전히 사유해 기억한다는 것, 그 고통에 대하여 다시금 떠올리게 된다. "한덩어리의 무의미"라는 상태에 도달해서야.


<3월의 마치>는 웹진 [주간 문학동네]에 8월 12일부터 11월 11일까지 매주 월요일마다 연재되었으며 총 12회로 구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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