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빈조 May 01. 2023

삼매경

[일기] 간헐적 순천살이 (4)

엊그제 저녁을 먹고 느즈막히 순천고등학교 앞까지 산책을 다녀온 이후 동네를 돌아봐야겠다는 생각을 했고 어제 오늘은 내가 머물고 있는 동네를 충실히 돌았다. 그날은 숙소 근처의 도시재생 거점공간들을 돌아보며 이 마을에서 운영하는 다른 쉐어하우스들의 위치를 살펴본 덕에 내가 머물고 있는 숙소에서 멀지 않은 곳에 한 번에 500원(이 글을 쓴 후 직접 사용해보니 500원이 아니라 4천원이었음!) 하는 코인세탁방이 있다는 사실도 알게 된 것이었다.(지난번에는 여기서 버스로 30분 가까이 이동해야 하는 순천대학교 앞까지 가서 코인세탁을 하였으며 그곳은 한번 이용하는데 4000원이 드는 곳이었다)아마도 이런 쏠쏠한 정보를 얻은 덕에 동네를 샅샅이 돌아당겨 봐야겠다는 생각을 한 것 같다. 다시 이곳에 오고 며칠 동안 날이 흐리고 자주 꾸물대었는데 어제에 이어 오늘까지 날씨가 화창하게 좋았고 이번주 후반부터는 며칠동안 비가 올 것이라는 예보 때문에 마음이 조금 급해졌다. 미루지 않기로 했다. 순천고등학교는 내가 머물고 있는 곳에서 걸어서 약 20여분 거리에 있는 곳이다. 내가 머무는 숙소는 저전동에 있다.  


어제는 봉화산의 끝자락에 해당되는 죽도봉을 돌았고, 오늘은 구시가지의 문화의거리 그 우측에 해당되는 저전동과 향동을 돌았다. 순천부읍성 남문터광장와 옥천을 끼고 좌우로 위치한 저전동과 향동에는 향교와 서원 등이 아직 많이 남아있는 곳이고 도시재생사업으로 문화공간이 곳곳에 자리잡고 있어 유동인구가 적지 않은 편이다. 애초에는 코인세탁방 처럼 유레카할 만한 귀한 정보를 얻고자 하는 목적이 있는 산책이었지만(이미 나는 운동겸 만보를 채울 생각에 산책을 하는 것이기도 했다) 오늘은 정말이지 그냥 산책이 되고야 말았는데 그 이유는, 국가정원박람회 기간인 순천 전체가 꼭 정원박람회에 참여하고 있는 것처럼 꼭 이벤트장을 도는 것과 같은 즐거움 때문이었다. 쓰레기봉투 하나 허투로 나와있지 않은, 정리가 잘 된 이 작은 동네의 집집마다 정원이 잘 꾸며져있었다.   


감탄을 하며 걷는 중에 남의 집 앞에 서서 요리조리 사진도 찍고, 그러다 갑자기 등장한 집주인과 인사도 나누었다. 그렇게 찍은 사진들은 산책삼매경 이라는 말과 함께 순천 태그를 붙여 오랜만에 인스타그램에 피드도 올렸다. 그리고 삼매경이라는 말에 오늘은 한참을 꽂혀있는 중이다. 그러고보니 나는 이곳에 있는 동안 멀티플 기능의 유효함을 잊고 지내고 있었다.


문자나 SNS 하며 걷기, 기사를 읽으며 음악감상하기, 친구와 통화하며 밥먹기, 유투브 보면서 볼 일 보기, 옷 갈아입으면서 다음 할 일 생각하기 등 일상에서는 물론이고 일 할 때는 더더욱, 한꺼번에 많은 일 처리기능이 꽤나 우등한 기능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 편이었다. 단순 일처리나 반복되어 습이 된 일에 온 에너지를 집중할 필요 없는 생활의 달인의 달인처럼. 시간도 돈인 서울생활에서는 대세에 큰 지장이 없는 한 되도록 없는 시간을 효율적으로 쓰는 것만큼 돈 버는 일도 없다 생각했는데, 이곳에서는 시간은 꼭 덤 같다는 생각이 든다. 이미 값어치가 가득한 것에 그보다 더 값을 쳐준 것과 같은 시간 속에서는 잡념 없이 한 가지 일에만 몰두하게 된다.  


가져온 이어폰을 쓰지 않고 있고 목적지가 있는 게 아니니 지도앱을 켜두고 걸을 필요가 없다. 눈을 돌리면 나즈막한 건물 위로 산들이 솟아있고 담과 벼락, 여백과 사이 그 경계를 한껏 치장하고 환대를 과시하는 골목들이 내내 보인다. 맛있는 걸 먹을 때는 반찬에 놀라고 식재료에 호기심이 발동한다. 동행자와는 기억에 남지 않는 시시콜콜한 대화를 하고 그 시간 이후까지 담아두지 않으며 다만 다정했던 여운이 돌아오는 길에 담긴다. 벤치에 앉아 계획에 없던 멍때리기를 하고 머리 위 새소리를 듣고 날아다니는 것들과 바닥에서 뛰어당기는 것들의 움직임에 주목한다. 서울생활과 이곳 생활의 다른 것이라면 단연 삼매경의 시간이다.              


PS. 산책과 수다, 맛집, 독서와 글쓰기 등의 삼매경에 빠져있는 시간이 나에게 편안함을 주는 와중에 눈이 돌아갈 정도로 정신을 혼미하게 만드는 것도 있으니 .. 그건 .. 안타깝게도 빵이다.(매일 밥먹고 디저트까지 챙겨먹고 있어 자꾸 배가 나온...)  

우리 남편은 길에서 만나는 강아지를 보면 사족을 못쓰는데, 나는 빵의 쉐잎을 보면 사족을 못쓴다. 배가 불러도 빵의 그 둥근 곡선과 잔뜩 뽐낸 모양을 보면 그걸 꼭 입에 넣어야 직성이 풀린다. 요 며칠 내내 꽂힌 건 조훈모제과점의 '촉촉바삭배빵'이었고(베스트 넘어 대상이라고 적힌데엔 다 이유가 있었다) 저번 포스팅에서 적은 옥천점빵의 조청스콘은 너무 치명적이라 집에 가기 전까지 그 근처에도 가지 않을 작정이다. 어제 점심으로 먹은 한베식당의 반미샌드위치도 너무 맛있었다능!    


작가의 이전글 명산물이 없는 게 아니다, 그것은 방앗잎이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