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대자연 ⑥
“자기는 일기 같은 거 쓰나?”
“.. 가끔 인스타에 글쓰는 게 일기 라면 일기랄까”
식사를 마치고 그릇들을 정리하기도 전에 커피를 내오던 미진이 물었다. 일기를 쓰지 않았지만 왠지 쓰지 않는다고 대답하기 싫어 대충 얼버무리듯 한 대답이었다. 밥을 먹는 동안 수인은 지난 설 엄마도 할머니도 떠난 고향을 찾았다가 예정없이 들린 먼 친적집에서 이혼소식 밖에 전할 길 없는 사촌동생과 당췌 무슨 대화를 나눠야 할지 몰라 계면쩍어 하던 사촌오빠의 가래끓는 소리만 한참 듣다 왔다는 미진의 이야기를 듣는 둥 마는 둥 했다. 미진은 무심하게 흘겨 듣는 수인을 앞에 두고서도 쉴새 없이 이야기를 하였는데, 어디 커뮤니티 게시판에 올라올 법한 그렇고 그런 명절 난감 가족사 같은 이야기며 아는 언니 소개로 만난 남자와 연인은 못되고 결국 친구가 된 이야기 같은 것 등이었다. 미진의 소개팅남은 귀농한지 7년차가 되는 이혼남으로, 루꼴라와 같은 외래종 채소를 재배해 유통하는 초보농사꾼으로 얼마전 생협매장으로 채소를 납품하기 시작한 사람이었다. 미진 보다 자그마치 열세살이나 많았으니, 그와 연인이 아니라 친구가 된 결정적 이유가 그 현격한 나이차 때문일거라고 수인은 짐작했다. 친구가 된 그 남자에게 얼마전 다른 의미의 여자친구가 생겼다는 소식을 전하며 조금 씁쓸해 보이는 미진의 얼굴을 보다가 수인은 전투적으로 하던 숟가락질을 내려놓고 한참 웃었고 그 무렵 저녁식사도 얼추 끝이 보였다. 겸연쩍었는지 식기를 들고 먼저 자리를 뜬 미진이 이내 커피향을 풍기며 이리저리로 움직였다.
“둬둬. 내가 좀있다 한꺼번에 치울 거니까. 근데 인스타는 있는 척 괜찮은 척 해야 하는데 아냐?”
“것도 나름이지”
“대나무숲 같은 곳은 못되잖아”
“난 언니 있잖아. 내 대나무숲”
“아 그렇습니까? 좋은 소식이네요. 제가 그런 역할을 한다니”
사과를 씻어 내오던 미진이 눈을 흘기며 자리에 앉았다. 수인은 곧 자신에게 일기를 써보는게 어떻겠냐는 미진의 충고가 날라들 것이라고 예상했고 침을 꼴딱넘기며 사각사각 사과 깎는 소리를 곧 있을 반전을 예고하는 효과음처럼 듣고 있었다.
“나는 일기를 처음 써본 게 이혼하기 얼마 전부터 였거든. 한동안 썼는데 언제부터 다시 안쓰기 시작했는지 기억이 안나는데. 안써도 괜찮아졌을 때부터 였겠지? 매일은 쓴 건 아닌데 모아보니 꽤 되더라. 그래도 한 2년 썼지 아마”
커피 한모금을 홀짝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수인은 짐작대로 이야기가 흘러가는 것에 약간의 안도와 동시에 얼마간의 무료함을 느꼈다. 삶의 굴곡과 파동이 조금 그리워지는 순간이었다. 예측불가능한 것들을 조금 긍정해보고 싶은 마음과 함께.
“자기 남의 일기 본 적 있어?”
“...글쎄..”
“내 일기 한번 읽어볼래?”
“...”
하얀 속살을 드러낸 둥글고 큼지막한 사과의 코어를 향해 절도있게 다도를 내리꽂던 미진의 시선이 물체를 버겁게 잡고 있던 왼손이 아니라 수인에게 돌아와있었고 커피를 한모금 넘기다 말고 정면을 응시하고 만 수인의 시선과 맞부딪혔다. 충돌에 의한 반사적 반응처럼 시선을 돌린 수인은 미진의 제안에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커피만 한모금 홀짝 마실 뿐이었다. 미진의 제안에 긍정하자니 그의 사정에 깊이 공감할 자신이 없었고 부정하자니 무정해보일까 우려되었기 때문이었다. 그 상대는 불과 몇 분 전 자신이 대나무숲과 같은 존재라 칭했던 사람으로 염치에 영 없는 것이었다. 절개넘치는 미진의 칼솜씨에도 제멋대로 잘린 사과조각들이 하나씩 코렐 접시 위에 올려졌다. 사과의 마지막 꼬다리 부분을 한 입 베어물다 일어선 미진이 싱크대에서 손을 씻은 후 현관 쪽으로 사라졌다. 그동안 잊고 있던 것을 떠올린 듯 그의 행동은 마지막까지 절개가 넘쳤고 수인은 앉은 자리에 그대로 얼어붙었다. 미진이 눈 앞에서 사라지자 모든 신경이 귀에 쏠렸고, 보이지 않는 어느 빈구석 안쪽으로 숨어든 쥐가 부시럭대는 것 같은 소리를 들으며 수인은 목 뒤로 소름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 팔에 돋아난 소름을 털어내는 것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미진이 사라진 방향으로 조심히 걸음을 옮겨 한번 넘어본 적 없는 서재방의 문턱을 넘자, 가장 먼저 공감각이 뒤이어 시각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기억 속의 후각이 반응했다. 거대한 그림자 하나가 수인과 나란히 우뚝 서있는 것 같았다. 방문과 나란히 벽에 붙어 바깥에선 깜쪽같이 보이지 않던 그것. 이거였다. 이 집 냄새의 근원. 히리춤에서부터 천장까지 낱장이 수없이 쌓여 올려진 탑, 몇 십년치의 신문지들이 쌓여 만든 탑. 수인은 문턱을 넘다말고 육중히 쌓인 그것들의 높이를 가늠해보려는 것처럼 천천히 시선을 위로 옮기며 킁킁거렸다.
“이사 올 때 버렸을까... 그럴리가 없는데.. 영 안 보이네”
수인은 이 집의 미스테리 하나를 푼 것처럼 눈을 반짝거리며 고개를 틀어 얇은 신문지들로 쌓아 올린 시간의 기록이란 거대한 탑을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연도별로 묶여 정리된 것으로 보아 미진이 소중하게 여기는 수집물인 모양이었다. 대판형의 신문보다는 작고 타블로이드판형 보다는 조금 커보이는 한국에서 보기 드문 사이즈의 신문지들이 배포되는 반 접힌 형태와 다르게 넓게 펼쳐진 형태로 표지면이 위로 향하게 쌓여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쩐지 중간 접합부분이 단체로 미세하게 솟아 보이는 것도 같았다. 그건 의미를 붙이기에 따라선 고작 이라거나 불과 같은 말이 따라 붙을만한 대략 27여년치의 신문들이었다. 대수롭지 않게 여겨지는 보잘 것 없는 것들이 쌓여 만든 거대한 부피감이었다. 혹자에겐 쓰레기일지 모르는. 그러나 그 순간 수인에게 그것은 흘러가기만 하던 시간과 기억이 어떤 계기에 의해 퇴적되어 부피를 이룬 진귀한 자연현상 같았다. 그리고 자신이 만든 시간의 구조물 속 안에 미진이 쪼그려 앉아있었다.
“여깄다!”
책장 가장 아랫칸에서 박스들 차례로 열어 뒤적거리던 미진이 단 세번만에 보물찾기에 성공한 어린아이처럼 소리를 질렀다. 일기장 한 권을 한 손으로 힘차게 들어올려 보이는 그의 뒷모습을 보고 수인은 별 도리 없이 웃음이 났다. 박스들을 대충 정리하고 미진이 방바닥과 무릎을 차례로 짚고 일어나더니 다이어리 한 권을 수인에게 내밀어 보였다. 회한도 미련도 없이 개운한 얼굴을 하고.
“언니는 다시 읽어본 적 있어?”
“아니. 난 다시 못 읽지. 자! 읽고 안 읽고는 이제 자기 마음가는대로~”
은색 생협 로고가 찍힌 네이비색 다이어리는 예상 밖으로 구김 없이 새 것처럼 깨끗해 보였다. 2017년. 누구의 것인지 구분할 수 없고 펼쳐보지 않으면 내용을 알 수 없는 이 다이어리는 단지 기록이 탄생한 연도만을 지시하고 있었다. 수인은 속으로 지나온 시간을 가늠해보며 오래 되지 않은 것에 살짝 놀라고 있었다. 오년쯤이면 아무렇지 않아질 수 있는건가. 수인이 손에 쥐는 것도 놓는 것도 아닌 손바닥 위에 올려진 상태 그대로 내 것인지 그의 것인지 알 수 없는 이 네모진 물체를 물끄러미 내려다보고 있을 때 띵동하고 초인종이 울렸다. 방 안 가득 경쾌한 두 음의 기계음이 둘 사이에서 진동했다. 미진과 수인의 눈이 동시에 동그래졌고 둘의 눈이 정면으로 다시 마주치는 순간이었다.
정월초하루.
다시 혼자가 되었다.
아니. 둘이다.
난 이제 혼자가 될 수 없구나. 이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난 혼자가 아니다.
2017.1.1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