끼니를 챙기는 사이

중편소설 - 대자연 ⑤

by 수빈조

그것은 낡았지만 단단해보이는 4단 원목서랍장의 상단에서부터 천장에 닿기 직전까지 연대기별로 켜켜이 쌓여있다. 한 눈에 그것들은 손상이 덜가고 쌓아두기 좋은 가장 안정적인 형태로 고이 펴져 차곡차곡 쌓여있고 그 개체수는 셀 수 없이 많으며 일정한 기준에 따라 여러 묶음으로 분류되어 있다. 상단 머리부분을 마분지를 접어 일정 두께로 묶어둔 것인데, 처음 보다 다소 누래진 마분지의 보이는 면마다 묶음별로 굵은 검정 글자를 적어 구분해두었다. 적힌 글자는 연도로 보이는 숫자들이며, 그러니까 연도별로 묶여진 그것은 1987년부터 한해도 빠짐없다가 마지막해인 2014년에는 ~7월 등으로 월까지 적혀있는 것으로 보아 27년 하고도 7개월의 기록을 쌓아둔 것이다. 2014년 7월로 종결된 것인지 더이상 쌓을 수 없어 멈춘 것인지 알 수 없이 꼭 의도된 것처럼 방기된 그것은 평균두께 2mm의 시간이 쌓여 만든 1.3미터 짜리 구조물처럼 보였다. 수인이 미진의 집에서 그것을 보았을 때는 이미 복수의 방문이 있은 뒤로, 현관에서 가장 가까운 서재방 안쪽 사각지대에 언제나 놓여있어 그것의 존재는 단지 집을 들어설 때 풍기는 집냄새만으로 확인할 수 있었지만 마주하기 직전까지 분연히 존재의 맹위를 떨치던 그것의 냄새조차 여전히 다른 것으로 착각하고 있던 것이다.


그날도 수인은 야근으로 늦는다는 수혁에게 아무렴 다 괜찮은 것처럼 잔뜩 하고 싶은 말이 생략된 간결한 두음절의 답신 “그래” 라는 문자 뒤에 마침표 세 개를 넣다 빼다를 반복하고 있었다. 너 이렇게 무심할 수 있어? 속으로는 이 말을 꾹꾹 눌러 담아 찍어두고선.


매일이 생사의 기로이고 위기가 곧 기회라는 문장이 사훈같기도 한 수혁의 작은 회사엔 끊임없이 새로운 프로젝트가 만들어지고 폐기되기가 일쑤였고, 그 덕으로 그는 언젠가부터 야근이 부쩍 늘어 피곤에 절어들어오는 날이 많았으며 둘만의 시간도 더이상 그에게 휴식처럼 느껴지지 않는 것 같았다. 문제해결의 당사자로부터 별다른 요청이 없었음에도 그의 에너지 비축을 위하여 수인은 자신에게 쏟아야할 관계 에너지를 최소화하는데 암묵적으로 동의했고, 그것이 그의 번아웃을 막는 유일의 방법 같기도 했다. 그리고 박봉의 직장을 그만두고 프리랜서로 전향한 후 비교적 심리적 여유가 늘어난 자신이 응당 취할 수 있는 그에 대한 각별한 배려라 굳게 믿었다. 그 자체로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것이 아니며, 그와의 관계에서 자신은 언제나 그 어떤 것과도 경쟁할 수 없는 존재란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 뒤로도 한참을 무엇도 상대에게 요청하지 않게 되었고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꼭 반려의 조건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러나 보슬보슬 내리던 눈이 소복히 쌓여 굳건할거라 믿었던 축대가 맥없이 무너져내리는 것처럼 섭섭함은 쌓였고 말수는 점차 줄고 한숨이 새어나오며 굳어진 얼굴 주위로 열감이 오르는 걸 자주 느끼는 사이 속 깊은 곳에선 울렁임과 더불어 의문이 증식되고 있었지만 습관처럼 수인은 어떤 말도 하지 못했다. 현 관계에 문제의식을 느끼고 상대에게 대화를 청하는 것조차 낯설어지고 있었다. 언제였을까. 관계를 바로 잡을 때를 놓쳐버린 건. 수혁이 어인 일로 술에 절어 집에 들어와 몸을 구불거리며 넌 왜 나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어떤 것도 요청하지 않느냐고 따져물었을 때 그간의 서운했던 것을 터놓으며 그래 이제라도 나와 시간을 좀 보내보자 했으면 나았을까. 다음날 맨정신에 이야기를 나눠볼 심산이었지만 아무 일 없던 것 같은 주말 아침 결국 둘은 아무런 말 없이 아침을 함께 차려 먹고 수혁은 영어학원으로 수인은 엄마의 집으로 그렇게 각자의 방향으로 뒤돌아 섰을 때, 수인은 그때로 자주 돌아가고 싶어졌다. 이맘때 수인은 자주 되짚고 되돌아보게 되었는데, 그렇게 되돌아보고 나면 문제해결 방법이 떠오르는 것이 아니라 왜인지 더욱 막막해졌다. 그순간 손에 들고 있던 휴대폰에서 진동이 얇게 울렸다.


내일이 정월대보름이라고 나물이랑 해서 나눴는데 혼자 먹기 양이 많네 저녁 안먹었음 올래~?


미진의 문자였다. 나물이랑 오곡밥을 챙겨가라는 엄마의 메시지에 좋아하지도 않는 찰밥 먹을 사람 없다고 매몰차게 거절했던 게 생각이 났다. 딸의 거절에도 꾸역꾸역 싸짊어지고 온 엄마의 오곡밥이 냉동고 속에 소분되어 저장되어 있었다. 수혁에게 문자를 보내려다말고 핸드폰 상단 배너에 뜬 미진의 메시지를 급하게 눌러 읽고 수인은 그인지 혹은 자신인지의 행방불명 상태에서 타의에 의해 세상 밖으로 건져진 기분이 들었다. 그러고보니 수혁과 엄마 외 다른 누군가와 연락하고 지낸 지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었고 금방 다시 생길 줄 알았던 일거리는 두 달이 넘도록 감감무소식으로 비즈니스 콜도 뚝 끊겨진 상태였다. 주위를 둘러봤을 때는 얼마나 이렇게 앉아있었는지 암전된 거실 가득 어둠이 까무룩하게 내려앉아 있었다. 수인은 요글래 누군가의 연락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핸드폰을 손에 쥐고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맥없이 앉아 있기가 일쑤였다. 이날도 어느 날처럼 일인용 소파에 앉아있던 수인은 서둘러 미진에게 곧장 넘어가겠다는 답신을 했다. 두 집 사이의 거리는 두블럭 정도 밖에 안되는 도보로 8분 거리였지만 수인이 미진에게로 가는 길에는 숨이 찰 정도의 오르막길이 있어 수인은 그의 집에 갈 때면 매번 넘어가겠다는 표현을 썼다.


“언니는 혼자 사는 거 어때?”

“왜? 나 혼자 사는 것처럼 보여?”


수인이 가져온 비닐에 담긴 냉동 오곡밥을 전자렌지에 넣던 미진이 수인의 질문에 눈이 동그래져 돌아보며 물었다. 수인은 맥락에 어긋난 미진의 저 난데없는 반응이 때때로 당황스러웠고 한편 항상 우스웠다. 수인은 오랜만에 코웃음이 났다.


“혼자 너~무 잘 살아서 능력있어 보여. 뭐 이런 거 원해?”

“어우야. 전혀. 아니. 절대. 연애 따위 필요 없는 매사 결연한 사람처럼 보이는 거 싫잖아. 근데 자기 토란국 먹지?”


가스렌지에 올려있던 오래된 양은냄비 뚜껑을 열던 미진이 아담한 부엌 한켠 각종 고지서와 약통과 손소독제 등이 너저분하게 올라가 있어 그것의 용도가 수납인지 테이블인지 알 수 없는 이인용식탁에 앉아 분주히 움직이는 자신의 뒷덜미를 따라 살피던 수인을 돌아보며 말했다.


“어어. 뭐 딱히 즐기진 않지만.. 대보름에 토란국을 다 먹어보네”


식탁 위에 올려진 코렐 둥근 3구 반찬접시 위에 하얀색 나물들을 둘러보며 수인이 혼잣말처럼 궁시렁거렸다. 사실 수인은 토란국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다. 특히 토란국의 주 식재료인 토란의 그 생김이 매번 낯설었다. 식물의 뿌리인 토란은 그 생김이 계란 모양 같아서 토란국을 받아들고 보면 죽은 생명의 응고체가 멀건 물 위에 떠 있는 것 같이 상상력이 발휘되곤 한 것이다. 정작 삶은 계란을 먹을 땐 굳이 하지 않던 재료에 대한 가치판단이 토란국을 먹을 때면 가차없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그러고 나면 먹기도 전에 입맛이 비렸다. 거기다 토란국의 토란은 삶아도 어쩐지 알싸한 맛이 나는 것 같았고, 그 고유의 맛과 어울리는 아삭한 식감이 아니라 무를 대로 무른 식감을 가진 토란의 그 부조화가 수인은 도통 적응이 되지 않았다. 식탁 위에 찬들을 의미 없이 둘러보다 다시 고개를 들어 토란국을 푸는 미진의 어깨 언저리쯤을 보았을 때 수인은 침을 꼴딱하고 넘겼다. 군침이 돌아서라기 보다 언니 이혼하고 어땠어 라는 말을 주워담느라 그런 것이었다.


“요샌 철이 없으니까. 우리집은 추석때 먹었지. 어제 저녁에 정수언니라고 동네 언니가 나눠먹자고 한~ 냄비 준건데 아직 먹을만해. 잡숴봐. 새 국 필요한 거 아니지?

“그럼. 저녁에 무슨. 있는 거 먹는거지”

“여봐. 내가 혼자 살 틈이 어딨니? 군대 간 아들 가끔 오지. 친구들 수시로 오지. 이러니 내가 연애도 못하고 이러고 늙는 거 아니겠냐~ 근데 너 혼자 살게? 수혁이 어디가?”


수인이 빙둘러 오느라 말의 틈새를 놓친 사이 미진의 물음이 불시로 들이닥쳤다. 문맥의 속뜻 전혀 알 길 없다는 듯 일부러 반쯤 헛다리 짚고서 였다. 이번 물음에 수인은 웃지 못했다. 수인은 미진이 정곡과 헛다리를 동시에 짚고 천진스럽게 말을 건내올 때면 뭔가 된통 들킨 기분이 들었고, 동시에 어쩌면 상대가 알아채주길 바라는 마음이 통한 순간처럼 안도와 희열이 스파크 튀듯 번뜩였다. 그 순간만큼은 상대의 공격을 순발력 있게 받아내 떠버린 공을 기회로 만들어 공격에 성공한 환상의 복식조라도 된 양 감정의 물리적 이동이 실제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것 같았는데, 풀어놓을 데 없어 쌓아두기만 하던 감정의 골에 물고가 툭하고 트이는 것 같은, 한참 뒤엉킨 실타래를 풀어보려 애쓰고 있을 때 뭉치 속 어느 부분에서 툭 하고 실 끊어질 때 느껴지는, 잔뜩 취한 다음 날 숙취가 쑥하고 내려가는 것 같은 일종의 해장 효과같은 것이었다. 거기에 더해 미진의 화법은 아는 척과 모르는 척을 동시에 수반하는 것이고, 네가 이야기하기 전까지 어떤 불화도 예상치 못할 만큼 네게서 전조증상을 느끼지 못했지만 무슨 사달있긴 있나 보니 얘기나 한번 해보라는 식으로 판을 조심히 깔아주고 나서는 것이다. 미진은 단촐한 단어선택과 억양만으로 숨기고 싶을 때 숨길 수 있고 털어놓고 싶어질 때 언제든 편히 털 수 있는 관계의 안전성을 확인시켜주는데 매번 성공했다. 그래서 사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심경의 변화를 누군가 눈치 채 주는 것만으로도 안도감이 들었고 또 그것이면 다 되는 것이었다.


“아니. 그냥. 외롭지는 않나 해서 물어본거야”

“그럼 연애 안하냐고 물어봐야지”

“그럼 소개나 시켜주고 물어보라고 할 거 아니야”

“그러니까. 왜 물어보냔 말이지이~”


미진이 토란국 하나가 올라간 숟가락을 입에 넣다 말고 입꼬리를 살포시 올려 웃고는 마주앉은 수인의 얼굴을 꿰뚫듯 쳐다보며 말했다. 고개를 숙이고 토란국을 휘휘 젓던 수인은 건더기 하나 올라가지 않은 멀건 국물을 한숟가락 떠 입에 넣고 새로운 사실을 안 것처럼 눈이 동그레져 고개를 들었지만 시선은 불명확한 곳을 향해 있었다.


“들깨가루 안 들어간 토란국은 처음 먹어 보네. 개운하고 좋다”


수인은 오랜만에 입맛이 돈 듯 전자렌지에 급히 대워 김이 모락 올라오는 엄마의 오곡밥 한숟가락을 떠 국에 적셔 가득 입에 넣었다. 별다른 찬이 필요 없을 정도로 국과 밥의 궁합은 찰떡이었다. 급속으로 뜨끈하게 덥혀진 밥과 성격이 급해 덥히다 만 미지근한 국의 온도도 적당히 잘 맞았다. 불현듯 허기는 그 무렵 찾아왔다. 들깨가루를 섞어 하얗게 무친 호박오가리와 건시래기, 건취나물을 차례로 한꼬집씩 집어 오곡밥 위에 올리고 토란국 한숟가락을 끼얹어 두세번 대충 쓱 비빈 후 숟가락 가득 넘치도록 설기게 뜨니 흘릴 새라 반사적으로 입을 크게 벌리고 마중 나간 입안으로 그새 고소한 기름냄새가 아삭거리고 숭덩거리고 질근거리는 다양한 식감과 함께 가득 들어와 찼다. 나물을 씹는 동안 어금니 쪽 교근에 힘이 바짝 들어갔다. 수인은 우근우근 거리는 것 같기도 하고 잘근잘근 거리는 것 같기도 한, 귓가를 먹먹하게 울리는 자신의 씹는 소리에 집중했다. 참으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식욕이었다.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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