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인모형

중편소설 - 대자연 ③

by 수빈조

수인은 자신이 한없이 작은 점으로 수렴되는 기분을 느꼈다. 타고온 기차를 떠나 보내기 전까지만 해도 이곳은 이 작은 반도의 나라 끄트머리에서도 작디 작은 지방소도시 쯤이라 짐작하고 말았는데, 수인은 무진역의 높은 천고를 올려다보며 이곳이 점차 미지하고 광대한 우주로 자신으로부터 넓게 확장되는 기분을 느꼈다. 낯선 역에 홀로 서서 자각하는 한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단지 이곳에 자신이 있다는 존재감각뿐이었다. 그 존재감각이 몸 안에서 뾰족해질수록 왜 더욱 상실감만 커져가는 것인지 수인도 알 길이 없었다. 수인은 밖을 나서다 말고 역사 주변에서 시간을 조금 더 보내야겠다 마음을 먹고 돌아섰다. 그 김에 미진의 집으로 가는 길의 경로 몇가지를 찾아보면 될 것이었다. 서두를 이유가 없었다. 급할 것 없잖아.


수인은 별도의 대합실이 없이 넓은 홀에 일정한 간격으로 놓인 맨 가장자리의 붙박이 벤치 옆으로 캐리어 가방을 밀어두고 벤치 위엔 배낭을 풀어 올려두었다. 배낭을 풀어놓을 땐 등 뒤로 시원한 바람이 부는 것 같은 청량감이 느껴졌다. 수인은 런닝셔츠와 함께 등에 달라붙은 청남방을 왼손으로 살짝 흔들면서 떼어내며 오른 손으로는 핸드폰을 들고 짐주변을 지키고 섰다. 원래대로라면 역사 밖으로 곧장 나가 긴 고민 없이 택시정류장에서 홀랑 택시를 잡아타고 미진의 집으로 가 무거운 짐들을 최우선적으로 부려놓았을테지만 시간을 지체한 후에는 별다른 의심없이 지도앱을 열어 택시 외 다른 대중교통을 이용해 미진의 집으로 가는 노선을 고집스럽게 확인하고 있는 것이다. 무진역에서 미진의 집까지 한번에 가는 버스노선은 2개가 있었고 버스로 16분 이동해 내려서는 2~3분 정도 걷도록 되어있었다. 미진의 집은 준공된 지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시영아파트로 길건너 호수공원이 넓게 자리잡고 있는, 무진시에서 다소 외곽 지역에 위치해있었다. 수인은 심장모양의 파란색 호수와 그것을 둘러싼 연두색의 호수공원을 지도앱에서 확인할 때 미진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무진이 고향인 미진이 이곳으로 되돌아와 다시 자리를 잡기 위해 물색한 몇군데 후보지 중 숙고 끝에 이 지역을 택한 결정적 이유가 이 호수공원이었다고 말했을 때 수인은 지척이 바다인데 호수가 뭐 대수냐고 그에게 대꾸했었다. 그 말에 아랑곳없이 이어진 미진의 말을 더 듣고서 그것이 호수 때문이라기 보다 호수주변으로 발달된 인프라 때문인 것처럼 들리기도 했는데, 이제사 지도앱으로 살펴보니 그곳은 대형마트가 아파트 단지들 가운데 자리잡은 신시가지 같은 지역이었고 여자 혼자 살기 적절한 지역처럼 보였다. 호수 인근으로 비어진 너른 땅에는 대단지의 아파트가 내년 11월 입주 예정이라고 되어있었다. 그는 매일 산책하기 좋을거야 라고도 덧붙여 말했다. 가는 곳마다 제일 먼저 산책코스부터 물색하고 보는 수인을 의식한 말이었지만 수인이 미진의 초대에 응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그의 초대에 미적지근하게 반응을 하고 우연히 인스타그램에 나온 광고를 보고 온라인서점에서 기어코 사버린 무진편의 간행물에서 보았던 사진들 때문이었다. 사진 위주의 자연환경과 대게는 그곳의 맛집과 카페들을 소개하고 있는 그 간행물의 목차 뒤 이 지역의 첫인상과도 같이 소개된 장에는 산이 많은 지형을 따라 동네까지 스며든 희뿌연 운무가 두 페이지에 걸쳐 가득매워져 있었다. 그 사진은 아랫단에 야트막한 집들과 운무 아래 짙은 녹색으로 드러난 산의 아랫부분이 아니었으면 온통 희뿌연 흑백사진으로 알았을지 모르는 넓게 찍힌 광각의 풍경 사진이었다. 그리고 시장과 몇 개의 간판 사진을 넘겨 어느 물빠진 쓸쓸한 해변가로 낙하하는 낙조 사진을 보고 수인은 미진에게 문자를 보냈다. 나 언니한테 갈래.

수인은 머릿 속으로 미진의 집까지 경로를 따라 이동해보다 애초의 계획대로 택시를 타는 것이 나은 선택인지 핸드폰을 들고 서서 잠시 고민했다. 그렇게 주춤거리던 사이 시야에 들어온 배너에 시선이 멈췄을때 자신이 갈증을 느끼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고, 뜨끈한 원두커피가 담겨 배낭 옆 주머니에 꽂혀있을 텀블러를 의식하며 일회용품을 사용해야 하는 것에 일시적인 죄책감과 망설임을 느꼈지만 수인은 여타의 죄의식들을 팽개쳐 버리듯 지키고 선 배낭을 자연스럽게 벤치에 부리고 역 내에 마련된 카페테리아로 차분히 걸음을 옮겼다. 카페테리아는 바깥에서 보는 것보다 예상 밖으로 넓직하고 쾌적했으며 그 때문인지 갈증이 한결 누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래서 수인은 계산대 옆으로 마련된 쇼케이스를 좌우로 서성이며 예쁘게 진열된 케이크들을 구경하면서 시간을 지체했는데 디저트를 고르는 것이 아니라 달달한 커피류와 시원한 에이드 사이에서 고민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결심이 선듯 계산대 앞에 선 수인은 결국 복숭아맛 아이스티를 시켰다. 진동벨을 받아든 수인은 주문이 완료된 음료가 제조되는 사이 카페테리아의 유리벽 너머 자신의 짐들을 살피다가 문득 그 안쪽 뭉뚱그려진 얼굴 없는 검은 물체에 시선이 꽂혀 속이 들여다보이는 듯 꿰뚫어보다 자신이 수혁이 보내왔다는 메일을 열어볼 엄두도 내지 못하고 더불어 완전히 신경을 꺼 외면하지도 못하고 있다는 걸 기어코 떠올리고 말았다.


무진행 열차에서 수혁의 문자를 받고 휴대폰 상단 메일앱을 열어 그가 보냈다는 메일의 제목만 확인하고 덮어둔 상태가 지금까지 지속되고 있는 중이었다. 그의 메일 제목은 숫자1로 시작하고 있었다. 헤어짐을 위한 몇 번의 자기 변명이 더 필요한 모양이었다. 수인은 숫자 1과 그 뒤 잇따른 제목 사이에서 무엇이 더욱 읽기를 주저하게 하는 것인지를 생각해봤다. 그러고보니 자신은 시리즈물도 몰아서보는 타입이었다. 타자의 의도에 따라 감정을 몰입해야 하는 완결성을 갖춘 콘텐츠라면 되도록 그 끝을 알고 시작하는 게 좋은 쪽이었다. 그러니 이 연재글의 문제는 완결이 당췌 몇 회로 끝이 나는지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정말이지 속에 맞지 않는 건 메일의 제목이었다. 너가 아니라 결혼생활이 나에게 맞지 않는 옷 같은 것이었어. 수혁은 자신과 한 결혼생활을 애써서 분리해내려 시도하고 있었다. 수인은 메일의 제목을 읽고 핸드폰을 든 손을 무릎 위에 내려놓으며 제발 그만둬 라고 소리내 말했다. 더군다나 그에 대한 세부 내용들이 본문 빼곡히 설명되어 있을 것이니 당장 그 글을 읽은 엄두가 나지 않는 것이었다. 휴대폰을 움켜진 수인의 왼손이 미세하게 꼼지락거리고 오른손에 쥐어든 진동벨에서 요란한 경고음과 함께 진동이 울렸다. 창측의 검은 물체에서 몸을 돌려 결연한 몸짓을 하고 픽업대쪽으로 걸으며 수인은 이 여행을 시작하기 전 수혁의 이혼일지 그 첫 회를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이스티를 오른손에 받아든 수인은 드디어 목적이 있는 일거리가 생긴 사람처럼 마음이 분주해졌다. 대합실 내부는 한차례 열차가 지나간 뒤에다가 평일 오후 시간인 까닭인지 한산했지만 왜인지 긴한 메시지를 읽기에 적합한 장소같지 않았다. 불특정한 사람들이 수시로 드나들며 흘러다니는 이곳 대합실은 언제나 산만한 인상을 주었다. 벤치에 부린 배낭을 어깨 양쪽에 단단히 매고 왼손으로 캐리어를 밀며 수인은 무진역 밖으로 무작정 나가보기로 했다. 무진역의 유리문을 온 몸으로 밀며 활짝 열고 나설 때 수인은 처음 이곳을 나서려 했을 때와 사뭇 달라진 마음이 들었다. 그것이 자신의 눈 앞의 광경때문인지 그저 자신의 마음이 아까와 다른 것인지는 알기 어려웠다. 수인은 무진역 처마 밑에 서서 인적 드문 작은 광장과 동근 화단을 두른 회전 교차로와 그와 같은 형태로 빙두른 야트막한 상가건물들과 그 뒤로 분홍빛 노을이 붓으로 쓱쓱 그린 듯 번져보이는 광경을 마주하고 서서 깊게 호흡을 들어마셨다 내뱉었다. 병풍처럼 둘러쳐진 무대 앞으로 느리게 좌우로 오가는 차량들이 의도된 소음을 내는 것처럼 적막함을 상쇄할 딱 그만큼의 작은 엔진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지구의 어느 작은 나라 어느 조용한 마을이었다. 수인은 자신의 시야 안에 들어온 광경을 눈도장찍듯 담으며 수혁의 메시지를 살피기에 적합한 장소, 적기의 타이밍이라는 생각을 했다. 광장에 일정 간격으로 놓인 그렇고 그런 벤치들 중 잠시 머물러 있을 것을 고른답시고 수인이 무심하게 고개를 돌린 쪽은 둥근 반원 형태의 구조물이 서있는 오른 방향이었다. 반형의 형태 앞으로 인간 형태의 모형이 함께 서있는 홍보구조물 같이 보였다. 인적 드문 탁 트인 장소. 저녁으로 향해가는 시간. 온기가 묻은 코끝 바람. 수인은 구조물을 옆에 두고 앉을 생각으로 오른 사선방향을 향해 걸었고 몇 걸음만에 당도해 벤치에 짐들을 내려놓을 때는 잠시 멈칫거렸다. 구조물 앞 인간모형은 캡슐형 헬멧을 쓴 우주인이었고, 안이 보이지 않을 만큼 검은 풀페이스 커버를 쓴 얼굴이 이쪽을 향해 보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마도 아이와 성인을 묘사했을 두 우주인 모형 뒤로 우주발사대가 있는 인근도시의 홍보문구가 적힌 반형형의 구조물이 포토존이라는 듯 서있었다. 오래된 것들이 남겨진 채 그 위로 발전적 문명이 켜켜히 쌓여 조화와 부조화 사이 이곳만의 무드를 만들어내고 있는 이 작은 도시에서 우주항공 도시를 홍보하는 조형물이라니. 얄팍한 상상력에 의지해 미지하고 광대한 우주에 대한 두려움을 상쇄하고자 애쓴 흔적이 역역한 이 구조물을 보면서 이걸 만들자고 제안했을 사람에게로 동기화된 듯 수인은 그만 피식웃고 말았다. 나에게 미지의 세계란 고작 너다. 이제 그 세계로 발을 내딛어 직접 가 볼 차례였다.

어쩌면 찰나였을지 모를, 그러나 꽤 한참만이라 생각되는 수백초의 시간이 흘러 휴대폰을 무릎 위에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을 때, 수인은 먼곳으로부터 번저온 분홍빛깔을 가만히 밀어내고 있는 회색조의 하늘을 보았고 감탄인지 숨인지 알 수 없는 작은 소리를 내며 깊이 숨을 내쉬었다. 차량 몇 대가 그 전과 마찬가지로 회전교차로의 굴곡을 따라 좌우로 흘러다니고 그 중 버스 한 대가 광장 앞 정류장에 덜커덕 거리며 섰다가 두어명의 승객을 태우고 느리게 출발했다. 둥근 얼음이 둥둥 떠 절반도 더 남은 아이스티의 투명컵 표면으로 몽글몽글하게 물망물이 작게 솟아올랐다. 분홍빛이 물러난 사위는 물을 많이 탄 홍차 색 같은 은은한 빛을 띄었고 드디어 수인은 자리를 박차듯 일어났다.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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