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편소설 - 대자연 ②
수인은 여행용 캐리어를 바닥에 털썩 내려놓았다. 허리를 펴고 일어선 수인의 고개가 자연스럽게 돌아온 길을 되돌아보는 것처럼 오른쪽으로 돌아갔다. 열차의 끝이 저멀리 끝없이 이어진 과거의 시간을 끊어내는 것처럼 수인이 팔을 뻗으면 닿을 듯 가까이 보였다. 6량의 짧은 열차였다. 배낭을 매고 반듯이 선 수인은 열차를 등 지고 섰다. 수인의 등 뒤에서 치근덕거리는 소리가 연신 들려왔다. 곧이어 삑삑 경고음 소리와 함께 열차의 전동문이 덜커덕거리며 일사분란하게 닫혔다. 열차는 종착지를 향해 느리게 흐른다. 수인은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앉아있던 소녀의 상반신을 유리창 너머 흐릿한 시선으로 상상했다. 수인은 고개를 왼쪽으로 돌리고 소녀를 조용히 배웅하는 것처럼 가만히 서서 열차가 자신의 시선을 따라 흘러가며 사라지는 것을 한동안 지켜봤다.
목 뒤로 훈풍이 스쳤다. 수인은 그제야 바람에서 뜨끈한 온기가 묻어나는 계절임을 느낀다. 오월의 끄트머리, 대략 싸잡아 오뉴월이라 불리는 초여름으로 계절이 물들어가고 있었다. 외부의 온기와 내부의 습기가 사방으로 묻은 청남방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졌다. 수인은 청남방의 왼쪽 소매단추를 풀어 팔꿈치 아래까지 소매단을 말아올렸다. 오른쪽 소맷단을 서툴게 접어올리며 주위를 둘러보던 수인의 눈에 반팔 티셔츠 아래 드러난 팔을 휘휘 저으며 날렵한 폼으로 계단을 막 뛰어오르기 시작한 한 여행자가 저만치 보였다.
여행자. 수혁이 계단을 오르다말고 내려와 가늘고 깊게 수인의 어깨를 파고들던 숄더백의 가죽끈을 잡아들더니 가방 안에 벽돌이 든거야? 라고 눈이 휘둥그레져 물었다. 이러니 힘들지. 그때 우리는 바르셀로나 구엘공원의 도마뱀조각상을 지나 가장 높은 전망대로 오르고 있던 중이었다. 수인은 그순간 여행지를 고를 때 촌스럽지만 최대한 멀리가보자는 자신의 제안에 수혁이 조금 난처해했던 얼굴을 떠올렸다. 짐을 빼앗기듯 넘겨 건넨 자신의 얼굴이 그때의 그의 얼굴과 유사할 것 같아서였다. 수인은 당시 수혁이 머릿속으로 후보지들을 떠올리느라 대답을 망설이고 있다고 생각했다. 수인의 첫 해외여행이자 수혁과 함께 하는 첫 해외여행이기도 했다. 며칠 후 두 사람이 안정기로 접어든 연애 2년차 연인을 위한 첫 해외여행지로 정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였다. 그 덕에 수혁과 수인은 여름휴가 3일에 이틀의 연차와 주말, 광복절까지 더해 총 8일간의 여행일정을 짤 수 있었지만, 비행시간을 빼면 두 사람에게 주어진 시간은 사실상 5일이 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바로셀로나로 여행지를 정하고 한창 여행계획을 세우던 어느 날 설립 5년차로 조금씩 규칙이 만들어지고 있는 직장에서 여름휴가에 붙여 연차를 쓰는 선례는 아마 자신이 만든 것으로 기록될 거라고 조금은 긴장한 얼굴로 수혁이 말했을 때, 수인은 그가 자신과의 여행시간을 만드는 데 꽤 큰 공을 들였다는 걸 알았다. 그러나 수혁아. 내 가방이 무거운 건 혹시 모를 일들에 대비해 넣어둔 온갖 잡동사니 때문만은 아니야. 그보다는 와인 때문이었지. 예정일은 아직 한참이지만 누군가 빌려주게 될지 모르니 항상 넣어두는 생리대 파우치와 역시 자신 외 다른 사람을 위해서 필요할지 모르는 호신용스프레이, 휴대용 핸드크림과 여분의 핸드크림까지 총 두 개, 다이어리와 얼굴의 상태를 자주 체크하지 않지만 각종 화장품이 든 파우치까지. 수인의 가방안은 당장 사용하지 않아도 기본적으로 넣고 다니는 물건들로 가득했다. 지금이야 가벼운 에코백을 주로 들고 다니지만 한창 수혁과 연애할 때는 싸구려 합성가죽 가방을 대게 들고 다녔으니 가방 무게도 만만치 않았다.
구엘공원을 돌아보기 직전 이들은 얼굴 가득 거부감이 가득한 매니저로부터 기둥 뒤 구석자리로 안내 받은 어느 스페인식당에서 두툼하게 구워나온 립아이스테이크와 치즈나 하몽보다 땅콩류가 더 많았던 것 같은 치즈플레터를 점심으로 시켜먹었다. 그 시절 두 사람은 온갖 촌스러운 짓을 다 해도 뭣모르고 좋았을 때였다. 첫 해외여행에서 점심부터 스테이크를 시켜먹은 것도 그런 것 중 하나였다. 수인이 힘든 건, 가방의 무게 때문도 있지만 넓고 분위기 있는 텅빈 홀을 둘러보다 인종차별을 받고 있는 것 같다고 불쾌한 기색을 내비치던 수혁이 호기롭게 시킨 비싼 와인 한 병 값이 아까워 두 잔을 나눠마신 탓에 취기가 오른 탓이었고, 지중해연안도시 답게 7월말 한여름 오후 뙤앙볕 아래 구엘공원 입구까지 걸어오면서 이미 머리가 지끈거리고 있던 차였다. 그리고 수인의 가방 안에는 3분의 1정도 남은 와인이 아까워 수혁의 반대에도 기어코 싸들고 온 와인병도 들어있었다. 수인은 수혁이 자신의 가방을 들어주기를 기대하지 않았다. 지금 당장 일시적으로 필요한 도움이라면 차라리 잠시 그늘에 쉬었다 가는 것이나 잠시 손을 잡아주는 것이었을 것이었다. 짐은 거의 모든 순간 내가 짊어질 만큼 짊어지고 있는 것이고, 거의에 해당되지 않는 낮은 확률로 짐을 덜어주어야할 도움이 필요했다면 자신이 먼저 도움을 요청할 수 있었다. 매순간 혹시 모를 사태에 대비하고 살아야 하는 건 매우 피곤하고 고달픈 일이지만 일이 벌어지고 난 후 피해를 입은 이에게서 그 동기를 찾는 의심의 이목으로부터 그 모든 싹의 빌미를 제공하지 않기 위한 것이기도 하므로 수인에게 이 짐들은 심리적 방어 차원이자 그 자체로 사후 물증이기도 한 것이었다. 이걸 기꺼이 함께 짊어져주겠다는 수혁의 마음을 모르지도 않았으므로 수인은 자신의 짐을 뺏어 들은 그의 행동을 그저 물끄러미 바라보며 수긍하는 듯 넘어갔지만 그의 조소띈 얼굴에서 뭘 이렇게까지 불안해하며 사느냐는 타박이 조금도 없었던 것이냐 하면 그 역시 완전히 부인하지 못할 거라고 그때나 지금이나 확신하고 있었다. 그리고 언제나 도움을 주는 편인 사람의 우월감도. 그러므로 그건 너 스스로 짊어진 짐이었어. 날 위한 것이 아니라. 넌 그저 이렇게까지 사는 내가 이제와 싫어진거고. 사실 계속 힘들었다는 말 같은 건 하지마. 이건 날 위해. 함께 산 5년의 시간을 위해. 너의 어느 시절의 소울메이트를 위해.
무게중심이 뒤로 넘어갈까 구부정히 가방의 무게를 지고선 수인은 눈 앞에 놓인 16인치 캐리어를 보며 그때의 수혁처럼 가늘게 실소를 내뿜었다. 가느다란 숨이 코에서 짧게 튕겨져 나왔다. 트렁크라니. 돌아갈 날을 기약하지 않았지만 당장 내일 마음이 변해 다시 귀경길에 오를수도 있는, 그야말로 수인의 마음이 내키는대로 모든 가능성이 열려진 일정이었다. 그런데 뭘 또 이렇게 바리바리 싸온 거였다. 캐리어에는 옷 몇가지와 비올 때 신을 경량신발 한 짝과 접이식우산, 곱슬머리를 펴는데 사용하는 고데기와 아이패드가 들어있었고 배낭에는 노트북과 책, 텀블러, 속옷, 화장품 파우치, 각종 충전기와 언제 돌아올지 모르는 집에 더이상 두면 안될 것 같은 양파와 삶은 고구마 등이 들어있었다. 수인은 이 여행을 계획하고 3일 동안 짐을 쌌다. 목적지에 도착해 정녕 이 모든 것이 나에게 필요한 것이었는지를 다시 한번 복기 하다말고 수인은 생각했다. 스스로를 부정하지말자.
수인은 캐리어 윗부분에서 철제손잡이를 펼쳐듯 올려 잡고 수평으로 밀며 드디어 앞으로 나아갔다. 바닥의 틈새를 지날 때마다 미세하게 캐리어 바퀴가 튀어 올랐다. 수인은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와중에 등 뒤에서 자신을 잡아끄는 힘을 동시에 느꼈다. 늦은 오후의 플랫폼은 부산한 기운이 한 김 빠진 후 그러고도 한참을 지난 것처럼 평화로웠다. 수인의 앞으로 이동통로의 입구가 꾸준히 다가오더니 위로 넓어졌다. 출구로 나가는 플랫폼 이동통로 앞에 거의 다다라 남은 두 개의 기둥 중 첫번째 기둥을 지났을 무렵 수인은 기둥 뒤 벤치에 다소곳이 앉아 작은 움직임으로 아니 꼭 멈춘 것처럼 사부작거리는 몸짓으로 무언가에 몰두해있는 한 여성을 곁눈질로 보았다. 그는 수인의 엄마뻘 아니 할머니뻘로 보이기도 했다. 하얀 원피스를 단정히 빼입고 뭔지 정확히 알 수 없는 초록색 채소를 열심히 다듬고 있었다. 뭉뚝해보이는 쇠뭉치로 초록잎의 윗부분을 따 그 부분은 그것이 나온 허벅지 위 봉다리 안에 넣고 다듬은 것은 왼쪽에 놓인 가방안으로 슬쩍 던져놓는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 같았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앉은 것인지 다음의 열차를 기다리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고 그보다 채소를 다듬는 것 자체가 그곳에 앉아있는 목적인 것처럼 보였다. 그것은 자기 집 거실 한가운데 TV 앞에 앉아있는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꼭 시간날 때마다 틈틈히 뜨개질을 하던 엄마처럼. 그래. 그러고보면, 뜨개질 같은 것이었다. 다만, 그는 채소를 다듬고 있을 뿐. 수인은 심상한 듯 그 광경을 지나쳐 마지막 기둥을 지날 때는 걷는 데 속도를 더 내었다. 캐리어바퀴가 바닥에서 요란하게 튀어올랐다. 에스컬레이터에 캐리어와 자신의 몸을 차례로 실어 올리고 서자마자 수인은 고개를 들어 이동 방향을 확인했다. 노란표시판에는 역 광장으로 나가도록 왼쪽방향으로 표시되어있었다. 수인은 오른쪽 바지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 미진에게 ‘나 도착’ 이라는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끝까지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등은 아까보다 더 축축히 젖은 것 같았고 수인은 약간의 갈증을 느꼈다.
무진역. 수인은 이곳에 연고가 없었다.
삽입된 사진은 여행 중 찍었던 사진들로, 대체로 특정 기간 한 지역에 머물며 오가던 여행자의 마음으로 찍었던 사진들을 삽입할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