옆좌석의 소녀

중편소설 - 대자연 ①

by 수빈조

수인은 홀연히 눈을 떴다. 지그시 눈을 감았다 뜬 것처럼 모든 것이 단조로왔다. 몸에는 그 하찮은 미동조차 없다. 분절된 의식이 저 너머의 시간으로 부단히 이어붙었다. 공백을 메우는 단꿈은 없었다. 그저 막간의 단잠이었다. 열차 내부는 꿈의 어느 결처럼 고요하고 거룩했다. 내부의 공기에서 아까와 다른 짙은 농도가 묻어났다. 차창과 얄팍한 블라인드를 이중으로 투과해 한껏 왜곡된 빛, 카스테라 속살처럼 은은하고 폭신한 노란빛이 열차 내부를 가득 메우며 산란중이었다. 수인은 눈을 감은 후 꽤 긴 시간이 흘렀다고 느꼈다. 왜인지 자신도 잠들기 이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인 것처럼 느껴졌다. 수인은 촐싹맞게 튕겨오르는 탁구공처럼 눈동자를 튕겨 이 은혜로운 빛을 갈라 주위를 살폈다. 그의 머리 위 영상송출기기에서 꽃들이 만개한 어느 국제박람회장의 홍보영상이 묵음으로 빠르게 흘러갔다. 수인의 건너편 창으로 창을 반쯤 가린, 혹은 가리다 만 블라인드 몇 개가 들쭉날쭉하게 보였다. 그러나 수인이 가장 기이하다 느낀 건 주위로부터 인기척이 전혀 없는 것이었다. 듬성듬성 앉아 대기 중으로 연신 부산함을 실어나르던 동승자들이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수인이 알지 못하는 사이 알 수 없는 곳에서 차례로 내려 이 여행을 종료했다. 그래서 수인은 이 열차 안에 자신 외 누구도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생각되었다. 이 모든 게 자신 만을 위해 돌아가고 있다니 황송한 마음이 들었다. 수인은 날씨와 조도, 공기의 질감과 소음, 공간의 진동과 차창 밖 풍경, 승객의 입장과 퇴장까지 자신을 제외한 나머지 것들이 완전히 통제되는 시스템 안에서 돌아가는 전지적 각자 시점 예능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된 듯 했다. 불의의 사고 따위 일어날리 없는, 잘못된 일은 자신의 바깥으로 비켜갈 것만 같은, 동시에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사치스러운 평화로움이었고 그래서 한편 공포스러웠다.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인가. 그러나 곧이어 그럴리 없다고 생각했다. 모든 게 너무 또렷했다. 이 여행을 시작한 이유도, 수혁과 나눈 대화도, 아무것도 담기지 않고 계속해서 흘러내리기만 했던 상실감도.


그때 수인으로부터 가장 먼 곳, 같은 량의 맨 앞인지 두번째 자리인지 알기 어려운 건너 창측 좌석의 등받이 위로 정전기가 일어나 어수선하게 부풀린 금발의 머리꼭지 하나가 눈에 들어와보였다. 어쩐지 잠은 이때 확실히 깨는 기분이었다. 수인은 등받이에서 머리를 떼고 자신의 오른편 좌석 너머로 시선을 옮겼다. 뭘 보겠다는 의지는 없는 채였다. 다만 차창 너머로 앞좌석에 가려져 사실상 아무것도 지시할 수 없는 표지판의 모서리 부분이 시야에 들어왔을 뿐이었다. 5분의 4 이상 가려진 표지판에는 정거장의 명칭이 적혀있을 거였고 그 내용은 수인의 눈에 단 한 자도 보이지 않았다. 열차는 어느 기착점에 멈춰있다. 눈을 감기 전과 가장 다른 것이라면 사실 이것이었다. 수인은 메일을 확인해달라는 수혁의 문자메시지를 받고 창쪽으로 고개를 틀어 자신의 오른편으로 느리게 사라지는 밭과 농막이기도 하고 공장과 산이기도 한 어떤 조합들을 무심하게 바라보다가 눈을 감았다. 수인은 몸을 움직여 어느 정거장에 멈춰 서 있는지를 애써 확인하지 않았다. 혹여 목적지를 지나친 것은 아닌지 하는 심려는 들지 않았다. 소요시간이 고속열차보다 두시간 이상 더 걸리는 무궁화호 열차는 도착지로 수렴될 뿐 어쩐지 영영 당도하지 않을 것처럼 느리게 종단중이었다. 이 막간의 단잠이 그 끝을 예고할 수 없었다. 그건 영원히 자는 것이다. 어쩐지 말이 되다 만 것 같은 이상한 문장들을 떠올리다 수인은 다시 등받이에 머리를 대고 눈을 감았다. 오해야. 그냥 편한 직장동료사이야. 더이상 설명하거나 변명할 이유도 없는.


좌석 등받이에 온 무게를 부리고 놓인 수인의 머리가 좌우로 살짝 흔들렸다. 열차 바닥이 쿵쾅거리고 엉덩이 아래 좌석 어딘가가 덜컥거렸다. 수인은 열차의 바퀴가 역사의 레일 위를 느리게 돌아가고 한바퀴씩 돌아갈 때마다 리듬에 맞춰 몸이 출렁이는 상상을 했다. 옆 차창으로 프레임 하나가 느리게 이동했다. 수인의 귀 옆으로 미세한 바람이 일었다. 귀 앞으로 삐져나온 구렛나루가 공기 중에 일렁였다. 눈 감은 수인의 신경이 몇 가닥의 머리카락으로 가 닿았다.


“저, 여기”


수인이 감은 눈을 다시 떴을 때, 앞좌석 등받이 위로 붙은 플라스틱 손잡이를 꾹 누르듯 댄 범상한 손 하나가 보였다. 힘줄이 도드라지지 않은 통통하고 누런 작은 손이었다. 연이어 손목을 타이트하게 감싼 블라우스의 소매끝단으로부터 천천히 시선을 옮기자 자줏빛 조끼를 덧입고 단정하게 선 애띤 얼굴이 보였다. 수인은 도무지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의 얼굴에는 당혹스러운 기색이 드러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에 걸맞지 않게 온화한 인상으로 수인을 내려다보았다. 언뜻 무표정인 것 같지만 입가엔 옅은 미소를 잃지 않았다. 자비로운 부처님 같은 너른 얼굴이었다.


“여기 제 자리 같은데요”


멍한 얼굴로 쳐다보기만 할뿐인 수인을 너그러이 기다리던 소녀가 용건을 꺼냈을 때 수인은 드디어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왜 이 텅빈 좌석들 가운데서 하필 옆자리에 승객이 있는 내 옆 좌석을 잡은 것일까. 자리잡고 앉은 자리를 털고 일어나야 하는 번거로움에 대한 원망이라기 보다 순수한 궁금증이었다. 그의 태도는 원망을 품을 수 없도록 차분하고 당당했다. 어찌되었든 수인이 남의 좌석에 앉아 괜스레 그를 번거롭게 한 것이었다. 블라인드를 쳐 풍광을 가리기 싫었고 불시에 들이치는 햇볕을 피할 방도를 찾아 빈 옆좌석에 부리듯 앉은 것이었다. 수인은 미처 주위를 둘러볼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의 심상한 말투에 압도당한 것처럼 창측 좌석에 놓아둔 자신의 에코백을 어쩡정하게 들고 두세차례의 엉덩이 들고 앉기를 반복하며 부산하게 옆자리에 옮겨 앉았다. 수인은 왜인지 가뿐 숨을 몰아쉬고 자세를 정돈하다가 그제서야 자신이 아직 꿈을 꾸고 있는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불현듯 이곳이 꿈결처럼 낯설었다. 그때 표시판에 적힌 글자가 눈에 들어와보였다. 곡성. 곡성이었다. 이 소녀와의 동행이 시작된 곳은.


커버사진: UnsplashRyu Orn